신유학에서 動靜은 宇宙本體를 설명할 때는 ‘動極而靜 靜極而動,’ ‘動而無動 靜而無靜’, ‘動中有靜 靜中有動’ 등으로 표현되고 心體와 공부의 문제를 설명할 때는 ‘動於氣’ ‘動於有我’ ‘動亦定 靜亦定’, ‘主靜’ 등으로 표현되었다. 다양하게 표현되는 動靜을 해석하는 문제는 本體와 공부상의 견해를 규명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미비한 편이고 특히 陽明學에서의 動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런 시도가 없었다. 이런 인식하에서 본 논고는 王陽明이 動靜개념을 바라보는 관점을 규명함으로써 그 공부론의 특징을 드러내고자하였다. 기본적으로 王陽明의 動靜觀은 그의 體用觀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宇宙本體와 心의 本體는 모두 良知 本體를 말하고 本體의 體와 用은 體에 나아가면 그 속에 用이 있고 用에 나아가면 그 속에 體가 있으며, 體가 곧 用이고 用이 곧 體인 相卽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모든 宇宙本體와 心體에 관한 動靜 표현은 모두 本體의 卽體卽用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陽明에 의하면, “動極而靜 靜極而動,” “動中有靜 靜中有動”, “動而生陽 靜而生陰”은 宇宙 本體의 感通과 寂然을 설명하는 술어로서 本體의 妙用이 쉬지 않는 가운데 항상된 體는 바뀌지 않는 것을 설명한다. 이 때의 動靜이 곧 體와 用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天理가 유행하는 하나의 이치(一理)로 本體의 완전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陽明은 ‘動而無動 靜而無靜’ 이라는 표현을 心體의 卽體卽用을 설명하는 술어로 해석하였다. ‘動而無動 靜而無靜’은 周敦?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物에 대비해서 神을 설명한 개념이다. 陽明이 이 표현을 “本體는 動하고 靜하지만 動靜의 구체적인 형상을 갖지 않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견해는 “動而無動 靜而無靜’”이 “體用一源”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陽明의 언급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本體가 動하고 靜하지만 動靜의 구체적인 형상을 갖지 않는 것”은 體와 用의 相卽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本體의 妙用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陽明이 보는 “動而無動 靜而無靜”은 心體에 있어서 體와 用이 相卽 관계임을 밝힌 것이다. 즉 ‘이런 體가 있으면 이런 用이 있다’는 것을 心體의 發用上에서 설명한 것이다. “動而無動”은 心體가 그대로 발현되어 動하였지만, 사사로운 欲에 動한 것은 없는 것을 말하며, “靜而無靜”은 心體가 靜하지만, 그것이 발현되었을 때 사사로운 의사로 인한 거짓된 靜은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구절은 모두 心體가 어떠한 장애 요인없이 온전히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動靜은 마음이 어떠어떠한 때, 곧 마음이 만나는 時의 의미이며 때론 마음에 장애를 일으키는 불완전한 요인이 된다. 心體의 본래성을 구현하는 문제에서 動靜은 역시 時로, 자기애(有我)와 사사로운 자기의사에서 비롯된 잘못된 工夫와 心에 대한 인식을 설명한다. 특히 靜을 구하려고 하는 공부 방법은 “구하고자 하는” 사사로운 자기 의사 때문에 오히려 더 靜할 수 없고 본질과 어긋나는 공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陽明은 “動亦動 靜亦動”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거칠건 미세하건 動한 것은 모두 인욕으로서 근본이 같다는 의미이고 이 표현 속에는 진정으로 참된 경지와 공부를 지향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陽明은 本體의 明覺은 본래 자연히 발현하는 것인데, 이때 어떠한 사사로움이나 작위도 없어야 온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本體가 발현할 때 자기애로 인한 動을 없게 하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 되는데 이때도 억지로 의도하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陽明이 이해한 動靜 표현은 결국 本體의 두 측면을 설명한 것임과 동시에, 본체를 가리는 불완전한 動靜이라는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動靜을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卽體卽用한 본체가 불완전한 動靜에 의해 가려짐 없이 본래성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하는 本體 공부론을 제시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