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양명학회 양명학 陽明學 제12호
발행연도
2004.8
수록면
77 - 100 (2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임진왜란을 극복하려는 조선 지식인의 노력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성리학을 재정립하여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성리학에 회의를 느끼고 양명학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일군이 있었다. 물론 후자는 당대의 지배적인 성리학에 밀려 표면적으로 크게 부상할 수 없었지만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철학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 논의하는 김창협과 민이승의 대립적 견해 역시 이런 변화의 조류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세기의 農巖 金昌協(1651-1708)은 退ㆍ栗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大學章句』「序文」의 小註에 있는 元代의 성리학자인 雲峰 胡氏(胡炳文)의 설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는데 이 비판의 근거는 주자의 관점이었다. 즉 주자의 인식에 근거하여 雲峰 胡氏의 설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러나 이런 농암의 태도는 1697년 雲峰 胡氏(胡炳文)의 설을 동조한 민이승에 의해 공격을 받는다.
尹拯의 제자인 閔以升(1649-1697)은 『大學章句』의 細註에서 운봉 호씨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농암과는 이견으로 知覺 논변을 벌였다. 즉 주자의 학설에 근거한 김창협은 智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理이며, 지각은 이 마음의 허령한 작용으로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또 지각을 오직 智의 작용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고 心의 지각을 智라고 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호병문의 이론을 지지한 민이승은 智란 心의 神明함으로 모든 이치를 묘합하거나 만물을 주재하는 근거라 하여 心의 작용으로 보았다. 농암의 입장에서는 智는 理이고 지각은 心의 작용이기에 분명히 지와 지각을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창협과 민이승의 차이점은 智를 理로 보는가 또는 心으로 보는가의 차이였다.
그러나 민이승과 김창협의 대립적 견해는 대상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농암이 성리학의 이념을 굳건히 하였다면 민이승은 양명학적인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민이승은 당대 양명학에 일가를 이루었던 정제두(1649-1736)와 학문적으로 깊이 교유하였는데, 정제두는 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겨 주자학을 배웠지만 나중에는 양명학에 심취하여 스승으로부터 양명학을 버릴 것을 종용받았다. 그러나 이때 정제두는 민이승과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한을 통하여 조목별로 心卽理ㆍ致良知ㆍ知行合一ㆍ親民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한 논란을 전개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의 두 견해의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良知體用圖〉와 〈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 내지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왕수인의 心卽理說를 받아들여 주자의 마음(心)과 理를 구별하는 견해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마음과 理의 일치뿐만 아니라 理와 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理氣合一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민이승이 智를 心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이런 학문적 교유와 무관치 않다. 따라서 농암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런 논쟁을 계기로 이른바 호락의 지각논쟁이라 불리는 판이한 知學論을 구축했다. 또 이런 논변을 통해 조선 성리학은 분화하고 심화된 이론을 더해 갔다. 나아가 이들의 智와 知覺에 대한 논의는 心性論으로 연결된다. 즉 知覺은 心의 작용이고 智는 理이며 性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는 智와 知覺에 관해 시작하지만 격론이 거듭 될수록 知覺은 心으로, 智는 性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때 농암은 6차례의 서신왕래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지만 민이승은 자신의 설이 틀린 것을 알면서도 지난날에 대한 잘못을 언급하지 않아 더 이상 서신을 쓰지 않겠다는 농암의 서운한 감정을 담은 서간으로 논쟁을 끝맺는다. 그렇지만 이런 智와 知覺에 대한 논의는 개인간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후일 농암 주변 인물들에게 하나의 담론을 형성하였으며 농암과의 처남 사이인 이희조와의 지각 논쟁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고 체계화 된다. 아우 김창흡 역시 형의 입장을 변호하여 「論智字說」을 쓰고 제자 어유붕도 「智與知覺辦」을 쓰기도 하였다. 심지어 농암 사후에는 권상하가 농암의 학설을 불합리하게 여겨 제자 한원진과 누차 변설하였고 지각문제에 대한 논의는 호락논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처럼 농암의 학설이 당대와 후대에 미친 파장을 고려할 때 그가 성리학자로서 차지한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살필 수 있으며 동시에 당대의 학맥을 통해서 얼마나 조직화되었고 발전시키고 치열하게 전개했는지를 살필 수 있다.

목차

【요약문】
Ⅰ. 지각논쟁의 발생
Ⅱ. 知學論과 心性論
Ⅲ. 후대에 끼친 파장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0-151-002108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