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양명학회 양명학 陽明學 제16호
발행연도
2006.7
수록면
45 - 82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근대 한국 양명학에서 王龍溪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를 爲堂 鄭寅普의 『陽明學演論』(이하 『演論』)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鄭寅普의 『陽明學演論』이 近代日本陽明學의 영향을 받아, 박은식의 근대한국양명학의 정초와 최남선의 기획에 이어 그것을 완성하는 연구임을 밝히게 된다. 이어서 정인보의 양명 후학에 대한 평가는 우선, 왕용계(畿)와 왕심재(艮) 그리고 당시 양명학 내외로부터 비난을 들고 있던 顔山農이건 何心隱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 모두 그들이 「진실된 학문을 한 사람」이라고 하는 등 王學左派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黃宗羲의 陽明學 左派 평가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또 하나의 특징은, 황종희와 마찬가지로, 흔히 ‘유교의 이단아’ ‘유교의 반역자’로 불리는 이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좀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그가 전서산의 편지를 통해 「평범한 듯하지만 실질적인 공효(功效)가 있는 것」과 「아주 오묘한 듯하지만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한 말」이라고 적극 평가한데서 알 수 있듯이 청년대중들이 사적인 욕망긍정 보다도 ‘착실한 공부’ 쪽을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저인보가 양명학 좌파를 긍정적ㆍ적극적으로 읽어 내고자 했던 것은 그가 양명학파의 ‘偉人傳記’를 모범으로 하여 당시 日帝 강점기하의 난감한 현실에 맞서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영웅’의 출현을 靑年들에게 희망하고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계몽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하 정인보의 이러한 내밀한 작업이 黃宗羲의 『名儒學案』에, 보다 구체적으로는 ‘양명학’에 의탁되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33년에 『東亞日報』에 66回에 걸친 게재가 이미 말해주듯이 저널리즘에 의탁한 청년 내지 국민 계몽의 차원에서 양명학이 기획되고,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박은식-최남선 등과 노선을 같이 하는 근대일본양명학의 영향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정인보는 전서산과 왕용계의 학풍은 일치한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왕용계는 트이고 명석한 만큼 위를 향하는 체득(體得)의 경지를 주로 많이 말했고, 전서산은 깊고 굳은 만큼 실제적인 일이나 실물과 같이 절실하고 가까운 데 있는 것에 대한 공부를 주로 많이 말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의 저면에는 정인보가 저널리즘을 통해 양명학을 구축하고자 한, 일본에서 발원한 근대양명학을 한국적으로 다시 領有(appropriation)하고자 했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양명학 영위의 독자성도 보인다. 다시 말해서, 박은식이 보여준 『王陽明先生實記』가, 정인보에 이르러 전서산, 왕용계 등의 「陽明門徒 及 繼起한 諸賢」으로 확대, 완성된 것은 근대한국양명학이 일본의 그것을 모방하면서 어렵게 독자적으로 당도했던 ‘근대한국양명학의 완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목차

【요약문】
Ⅰ. 시작하는 말
2. ‘近代韓國陽明學’의 완성자로서의 鄭寅普
3. 鄭寅普의 王龍溪 이해
4.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提要〉

참고문헌 (24)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0-151-002107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