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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회 사학연구 史學硏究 第88號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617 - 65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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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성종대까지 주로 재이에 대한 대책으로 행해졌던 구언은 민본정치를 이루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언로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연산군과 중종대에 이르면 이같은 구언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를 ‘凌上之風’으로 규정하면서 점차 언론행위를 무력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구언도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재위 후반기에는 일체 구언을 하지 않았다. 反正의 성공으로 즉위한 중종은 막힌 언로를 회복하기 위해 재위 전반기에 자주 구언하였지만, 연산군의 폭정을 경험했던 신료들에게는 군주의 도덕적 실천=수성만이 天의 경고에 응답하는 실질[應天之實]이었다. 응지상소의 내용도 이전처럼 제도의 개혁이나 정비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보다는 군주의 수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같은 신료들의 요구가 중종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면서 구언은 허례로 인식되어 별로 행해지지 않았다. 단지 ‘草澤之士’로 표현된 재야의 유생 또는 사림의 의견을 듣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헐적으로 행해질 뿐이었다.
구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요구된 군주 수성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무엇보다 강조된 것은 ‘正心’이었다. 정심에 대한 강조는 ‘正心之要’로 인식된 『大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후 16세기 후반기에는 君主聖學論이 제기되는 한편으로 『心經』에 대한 탐구도 이루어졌다. 결국 16세기 조선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心性論의 심화는 군주의 수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중종대의 정치사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구언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군주의 수성이 강조되면서 군주의 수성을 통해 이루어야 할 현실 정치에서의 공효인 ‘휼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민생과 직결되었다는 점에서 구언의 동기로 중시되던 旱災가 더이상 심각한 재이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星變이나 日變과 같은 왕의 안위와 관련된 재이가 중시되었다. 국가가 민본정치를 행하는지의 여부가 가장 천한 신분의 민에게까지 의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초의 민본이념은 이미 변질되고 있었다. 국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던 민은 이제 스스로 토호나 품관의 예속민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구언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 배경
Ⅱ. 구언 동기의 변화와 민본이념의 쇠퇴
맺음말
참고문헌
【附表】 연산군ㆍ중종대의 구언
Abstract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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