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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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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백용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강상규
발행연도
2016
저작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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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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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세기 후반 주일 영국외교관인 어니스트 사토(Ernest M. Satow)와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초기 개화파 인물들의 관계를 분석하여 조선 개화당의 형성 과정과 역할을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기존의 조선 개화파 연구는 주로 조선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갑신정변 등 굵직한 사건이나 개화세력의 주요 인물들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왔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력은 갖는 주일 영국외교관 사토의 시각으로 조선의 사정을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사토와 접촉한 초기 개화파 세력들이 서구와 수교과정에서 보여준 자율적인 모습을 조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동인이 도일 과정에서 일본의 도움으로 친일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일부의 연구에 대비하여 조선의 자주를 향한 이동인의 노력과 행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한국 근대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낯선 인물인 이동인이 도일하여 서구 외교관과 일본 조야인사와 접촉하였다. 밀항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양의 국제법 질서를 배우고 비밀외교를 수행한 이동인은 조선의 근대 외교에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이동인의 뛰어난 능력과 외교수완으로 국제정세를 살펴 조선의 자강(自强)을 꾀한 부분에 대하여 고찰해 봄으로써 이 시기 조선의 외교정책 연구에 연구사적 의의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본 논문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개화파 인사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주로 1878년부터 1883년 사이의 사토와 도일 조선개화파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간다. 이동인을 비롯한 김옥균, 박영효 등 일본과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개화당 인사들이 사토와 접촉한 행적들은 「사토문서」를 바탕으로 하였고 이동인의 도일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관여한 내용은 『조선국포교일지』를 중심으로 그 기록 순서에 맞춰 고찰하였다.
Ⅱ장에서는 외교관으로서 사토의 생애와 함께 사토가 조선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 사토는 1877년 사쓰마(薩摩) 도자기의 산지인 가고시마(鹿兒島) 조선인 도예촌을 방문하여 조선어와 조선인의 풍습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사토는 1878년 외국인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조선의 외교정책에도 불구하고 바버라 테일러(Barbara Taylor)호의 난파로 제주도인과 관리들에 의한 구조 활동에 대해 사의를 하기 위하여 조선을 방문하였다. 조선의 지방 관리들과 회담하며 조선인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으며 구두로나마 난파선 처리에 대하여 상호 간에 약속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사토의 혼간지 부산별원 방문은 오쿠무라 엔신과 사토의 접촉으로 이어지고 밀항한 이동인이 사토를 찾아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밝혀냈다.
Ⅲ장에서는 이동인이 일본으로 밀항한 이듬해 영국 공사관의 사토를 찾아가 조선어를 가르치는 동안 그의 인품을 신뢰받고 영국의 대리인(agent)이 되는 과정을 찾아낸다. 이동인이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서 기지를 발휘하여 조선의 정계에 진출하는 모습과 뛰어난 능력으로 국제적 감각과 외교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바탕은 사토의 외교적 수완에 대한 조언이라 할 것이다. 또한, 탁정식이 이동인의 사망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에게 구명 자금을 요청한 것은 이동인의 실종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해리 파크스(Harry Smith Parkes) 주일 영국공사는 박영효의 1차 조영수호통상조약(Willes조약)의 비준에 대한 수차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것은 영국이 조선과 통상에서 별로 이익이 없고 당시 일본과 협상중인 조약개정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정책의 결과였다.
Ⅳ장에서는 이동인의 행적과 오쿠무라 엔신의 접촉이 단순히 친일적이라는 정치적 구도와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해 보았다. 개항으로 부산에 진출한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오다니파 혼간지 부산별원(大谷派本願寺釜山別院)이 피폐해진 조선 불교의 틈을 파고들어 포교하는 과정과 원주(院主)인 오쿠무라 엔신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오쿠무라 엔신은 이동인을 비롯한 개화당 세력과의 연결로 당시의 조선 국금을 어기고 밀항을 지원하였으며 밀무역을 통한 개화당 자금에도 관여함을 보였다. 또한, 단순한 포교의 수준을 넘어 일본 영사업무와 외교정책에도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동인을 비롯한 초기 조선개화파는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서구의 조약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 조선의 자주를 위한 적극적인 외교 행동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에서 나타나는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전반에 서구 국가들과 수교 과정에서 보여준 개화당 세력의 노력은 일본과 서구 열강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문명개화를 앞당기고 외교적으로는 조선의 독립과 국운을 위해 진력을 다하였음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초기 조선의 개화파는 자주적이고 내적 발전으로 형성되었으며 자신들의 사상과 행동을 명확히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일본에 의한 조선 침략의 필연성을 부정하고 조선 고유의 내면적인 자주에서 발전한 것임을 밝혀내어 한국 근대사의 단면을 재조명하였다.

목차

Ⅰ. 서 론 1
1. 문제의식의 소재 1
2. 선행연구 검토와 문제 제기 3
3. 연구의 범위와 방법 6
Ⅱ. 어니스트 사토와 조선의 조우 9
1. 어니스트 사토의 생애 11
2. 사토의 조선에 대한 관심 14
3. 사토의 조선방문과 외교접촉 18
Ⅲ. 영국 외교관과 조선 개화파 30
1. 조선개화파의 청국주재 영국공사관 방문 30
2. 사토와 이동인의 비밀외교 33
3. 이동인 실종과 탁정식 56
4. 사토와 만난 도일 조선인 63
5. 주일 영국공사관 인물과 도일 조선개화파 73
Ⅳ. 이동인의 도일과 오쿠무라 엔신 82
1. 히가시 혼간지 부산별원의 오쿠무라 엔신 84
2. 이동인의 1차 도일 88
3. 이동인과 탁정식의 2차 도일 103
Ⅴ. 결 론 124
참고문헌 129
부록 140
1. 사토일기의 조선 관련 내용 141
2. 『朝鮮國布敎日誌』로 보는 이동인 관련 행적 143
3. 사토의 저술 목록 146
4. 『遠い崖?ア?ネスト?サトウ日記抄』전권목차 및 연대 149
5. 사토문서.『朝鮮?布?日誌』. 이동인 서한 사진 150
6. 주요인물 소개 155
7. 관련 인물 및 사적지 사진 162
Abstract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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