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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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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심경보 (고려대학교, 高麗大學校 大學院)

지도교수
邊英燮
발행연도
2014
저작권
고려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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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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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衣肖像은 深衣를 입고 그린 초상으로 조선 17세기 말에 송시열에 의해 제작되기 시작한 이후, 근대기까지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제작되었다. 심의는 公服과 대비되는 野服의 종류 중 하나로 『禮記』?『朱子家禮』를 통하여 유학자의 대표적인 복식되었다. 조선에서 심의는 古典의 해석에 따라 외형차이가 발생하였고, 각 학파별로 노론은 “直領深衣”를, 기호남인은 “方領深衣”을 제작하였다.
조선에서 ‘심의초상’의 의의는 17세기 후반에 宋時烈에 의해 정립되었다. 송시열은 심의초상을 통해 공자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상징하고, 「가례」의 일상화란 의의를 내보이고자 하였다. 이후, 당대 山林의 종정으로 송시열은 노론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생전에 남긴 초상과 영초를 바탕으로 송시열像과 심의도상이 후대에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이 반복된 18세기 전반에는 송시열의 직계 문인들에 의해 ‘송시열과 심의’에 대한 의의가 심화되고, ‘심의도상’이 전승되기 시작하였다. 權尙夏?鄭澔?尹鳳九 등의 송시열의 문인들은 ‘심의초상’을 제작하여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특히 이 시기 노론 문인들과 秦再奚-秦應會 부자는 오랜 기간 교유하며 지속적으로 초상을 제작하였고, 빠르게 발전한 18세기의 초상화풍을 노론 문인들의 초상에 성공적으로 적용하였다. 또한 진재해는 경종년간 집권한 소론의 초상제작을 거부하여 사대부화된 화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상?정치적 분야에 한정되있던 명분론이 사대부-화원의 관계로까지 확장되어 갔음을 알 수 있어 점차 사대부 문화에 함께 동조해간 18~19세기 화원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1756년(영조 32)의 송시열?송준길의 문묘종사와 정조년간의 송시열의 宋子 추숭의 영향으로 인하여 송시열 초상의 이모와 전승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송시열像은 17세기 말 이래로 규정된 안면과 신체에 대한 특징을 고수하면서도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송시열 초상들의 화풍도 이어받았다. 반면 노론 내에서는 송시열 이후 사상적 분화와 명분론의 계승을 둘러싸고 미묘한 도상의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론과 낙론의 문인 초상은 각각 송시열과 권상하의 적전이라 주장하며 『주자가례』의 범례를 고스란히 따르고자함과 朱子註 해석의 범례를 확장시켜 일부 의복에서 다른 도상을 채용한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호론은 18~19세기에 지속적으로 한원진의 초상을 임모하여 ‘先賢중심의 초상제작’ 양상을 보인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의 한원진 초상은 권상하 초상의 특징도 반영하여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학통계승의 의지를 보여준다. 반면 낙론은 구성 주요 가문의 인물들이 대를 이어 심의초상을 제작하는 ‘가문중심의 초상제작’ 양상을 보인다. 낙론은 충청지역의 향사로 남은 호론과 달리, 정조년간 이후 대부분 경화사족화 되어 대를 이어 조정에 종사하면서 일부 가문의 경우는 외척?벌열이 되었다. 낙론의 심의초상은 당시 노론의 주도 가문이었던 안동김문과 전주이문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이들 낙론 초상들은 노론의 심의제도를 고스란히 따르면서도 주자의 服儀가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도상의 일부를 변용하였다.
기호남인은 古典에 대한 고증을 우선하였고, 이에 따라 『예기』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방령심의’를 초상의 도상으로 정착시켰다. 다만 심의론의 비판적 수용과정을 통해 일률적이지 않은 다양하고 개성적인 방령심의도상이 초상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 이후 이익이래의 기호남인의 학통이 성립되면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1788년에 그려진 李森煥의 초상과 1873년에 그려진 許傳의 초상은 각각 자신의 심의설을 바탕으로 초상을 제작하여 方領의 공통점 외에는 많은 세부적 표현을 달리하였다. 이것은 노론의 심의도상이 전승을 목적으로 한 것에 비해, 남인은 실질적 심의제도 고증이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후기 深衣制度
1. 深衣의 전래와 경전별 해석
2. 학파별 심의제도 비교
Ⅲ. 송시열像의 성립과 영향
1. 송시열像의 형성
1) 송시열의 회화관 : 載道論?名分論
2) 송시열像과 심의초상의 의의
2. 송시열像의 계승
1) 진재해의 송시열像 제작
2) 송시열像의 이모와 확산
Ⅳ. 노론계 심의초상의 양산과 변화
1. 18세기 전반, 송시열像과 심의초상 수용
2. 18세기 후반, 심의초상 계승과 변용
1) 湖洛論爭과 심의초상의 분기
2) 호론의 김원행像 계승
3) 낙론의 家門중심 초상 제작
4) 非深衣계열 야복초상 양상
Ⅴ. 기호남인?소론계 심의초상의 형성과 특징
1. 기호남인의 심의인식과 方領深衣肖像
1) 18세기 이전, 남인계 초상 양상
2) 성호학파의 방령심의초상 제작의 의의
2. 소론계 심의초상의 복합적 양상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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