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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박순진 (동국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金福順
발행연도
2013
저작권
동국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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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4)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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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경상도 의병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경상좌도 청도 의병진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 경상도 의병연구를 충실히 하고, 청도 의병이 壬辰倭亂史에서 갖는 의의를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무정부 상태의 긴급한 상황에서 경상좌도에서 가장 먼저 倡義한 것은 청도지역 의병이다. 청도 倡義 의병진은 국가와 향토수호를 위해 박씨 一家門의 형제, 종반, 숙질 등 14義士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의병진은 후방에서 점령 왜군과 유격전을 전개하여 왜적의 보급로 및 병력이동을 차단하고 향토를 왜적으로부터 막아내는 등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청도지역 의병활동 연구는 전반적으로 미흡하여 경상우도의 의병활동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따라서 임진왜란기 경상도 의병활동이 임진왜란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청도 의병진의 연구가 꼭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기 경상좌도 청도 의병진의 조직과 활동을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한 연구방법으로는 첫째, 기본사료의 철저한 분석을 하고 둘째, 기본사료의 재구성을 통해 청도 의병진의 활동상을 고찰하는 것이다.
먼저, 청도 의병의 활동에 대한 주요 자료인 <14의사록>을 분석하여 기본사료로 삼고 이 <14의사록> 속에 게재된 <倡義日記>, <助戰日記> 및 14의사의 유고 등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이와 연계된 여타의 의병장들의 문집(<성재실기>, <낙재일기>, 조정의 <임란일기> 등)을 대조·분석하였다. 특히 <창의일기>는 임란 발발 초기 청도 의병의 활동에 대한 전투일기로서 매우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창의일기>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지속적으로 이루질 필요가 있고 그러한 연구가 이어진다면 임진왜란 초기 청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보다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생각이 된다.
다음으로, <14의사록> 등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청도 밀양박씨 일가문 14인이 중심이 된 朴慶傳 의병부대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고찰, 특히 당시 주요 전투를 자세히 분석하여 박경전 의병진의 구체적 전투상황과 전쟁수행의 결과를 종합함으로써 청도 의병진이 청도지역에 한정된 폐쇄적인 지역 의병의 범위를 넘어 경상좌도의 의병 활동에 끼친 영향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론에서는 淸道 義兵의 창의 배경과 의병의 조직, 활동 및 주요 特徵을 살펴보았다.
첫째, 義兵將 및 핵심참모들이 밀양박씨 일가문 14인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경전을 중심으로 14명의 부자 형제 숙질 종반이 渾然一體가 되어 총체적으로 의병에 나섰으며 주요 구성원 대부분이 소요당 朴河淡의 손자 또는 종손자로서 박하담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實踐躬行을 목표로 철저한 자기 수양을 강조해온 박하담가의 家風이 壬辰倭亂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처하여 行動으로 나타난 것이다. 가문의 재산을 희사하여 義兵을 일으킴으로써 멸문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들은 그 성패를 초월하여 오로지 국난 극복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창의하였다.
둘째, 壬辰倭亂 발발 초기에 慶尙左道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였다는 점이다. 그것도 朴慶傳, 朴慶胤 형제는 선친의 시묘 움막에서 임진년 4월 20일에 淸道가 함락된 것을 알았고 3일간 형제 종반 간에 상황대처에 대한 의논을 거쳐 倡義를 결심하고 淸道地域을 사수할 義兵陣의 구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때의 군사는 고작 1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그로부터 7일 동안 산속에 피난해 있거나 흩어진 鄕民들을 상대로 모병을 하여 500여 명에 이르렀고 1개월 후에는 3,000명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단시간에 다수의 義兵 모집이 가능하였던 것은 義兵將 朴慶傳의 人品과 그 가문의 世德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셋째, 거병 초기 국가의 행정 공백기에 관의 지원 없이 일가문이 사재를 털어 군수품을 조달하고 자체군법을 실시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점이다.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고을의 철조각을 수집하여 병기를 만들었다. 청도 의병진이 자체적 군사운용이 가능했던 요인은 朴慶傳 중심의 14義士가 학문뿐만 아니라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만큼 兵法과 武藝에 상당한 力量을 갖춘데 있다 하겠다. 또한 지휘관들의 군사적 소양으로 인하여 전쟁 발발 초기에 신속하게 義兵을 일으킬 수 있었고 휘하의 의병대원들은 지휘관을 믿고 따름으로써 自家軍法의 施行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청도 의병이 전투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서 매우 중요시 된다.
넷째, 義兵과 官軍의 연합을 자발적으로 시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특히 義兵將 朴慶傳과 조전장 朴慶新이 군수 배응경과의 성공적인 연합을 통하여 군사력의 증강을 도모한 점이 주목된다. 수많은 전공을 수령, 官軍 및 휘하 義兵들에게 돌림으로써 오로지 국가보전과 鄕土방위에 나섰다. 이러한 사실들은 의병진의 사기를 높이고 단결력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으며 박경전 의병진의 강한 군사력의 기초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종합해보면, 청도 의병진이 경상좌도 의병사에서 가지는 의의는 결코 가볍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청도 의병은 14의사가 중심이 된 밀양박씨 일가문의 총체적 궐기로서의 특색을 띠고 있으며, 조정과 관군의 활동이 불가능했던 암담한 시기에 경상좌도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였다.
청도 의병의 핵심을 이루는 14의사 및 주요 참모진들은 대부분이 무관이거나 무예와 병법에 상당한 식견을 지닌 인사들로서 의병부대의 용병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 利點으로 인하여 임란초기의 파죽지세의 왜군을 맞아 연이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德將으로서의 박경전은 탁월한 군사적 식견과 넓은 도량으로 관군과 의병의 연합을 자발적으로 이루어 냄으로써 의병의 戰鬪力을 획기적으로 增强시켜 적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자인의 최문병 의병진과 연합하여 치른 두곡전투, 선암구전투, 동곡전투를 비롯한 전후 60여 회의 전투에서 거둔 청도 의병진의 전투성과는 점령왜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왜적의 등 뒤에서 화살을 겨냥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그 후에 전개된 영천성 및 경주성 탈환전의 초석이 되었다.
청도 의병은 壬辰倭亂 발발 직후의 암흑천지였던 慶尙左道의 청도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대구, 밀양 등을 보전하였고 慶尙左道의 占領 일본군을 가장 먼저 이겨냄으로써 당시 점령왜군의 주력부대가 있던 영천과 경주로의 왜군의 이동경로를 차단함으로써 그리하여 임란초기 영천, 경주 등을 지켜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청도 의병은 단순히 폐쇄적 독자노선을 걸어간 소규모의 향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2~3개월 후에 전개된 영천성과 경주성 탈환작전의 기폭제의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도 의병의 활동이 임진왜란사에서 갖는 의의는 경상좌도 慶尙左道 義兵의 先驅的 役割을 하였다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the volunteer corps(義兵) in Choeng-Do, a southeastern city of Cho-Sun(朝鮮), which uprose under the leadership of Kyoung-Jeon Park(朴慶傳) in the early stage of the Japanese invasion. At the beginning of the war, the Gyeong-Sang left district(慶尙左道) was attacked and badly destroyed by Japanese army. So Kyoung-Jeon Park in Choeng-Do raised an army for the first time in this region not only for the protection of their families and villages, but also the dynasty and Country.
Kyoung-Jeon Park, the commander of the volunteer corps, is from the Milang(密陽) Parks family which represented a Sarim(士林) group of Gyeong-Sang left district in 16th century. He with other 13 family members (later they were honored as 14 righteous persons) raised an army with 100 persons by April in 1592 and donated entire fortune to the corps. In a month they gathered 3,000 volunteers and fought against Japanese army in the local area, because the government troops fled at the sight of Japanese enemy.
They had difficulties of food supplies and reinforcement. Against all difficulties that can collapse the morale of the volunteer armies, the commander group tried to achieve economic self sufficiency. The commander Park and 13 corps leader were former man of learning, but they were well acquainted with martial arts and tactics. So they launched a guerilla war and won consecutive victories.
Above all, it is worthy of notice that the corps in Choeng-Do tried to make relationship with the government troops, which came back from the desertion in the early stage of the war. It is evident that volunteer corps in the whole country had an ambivalent relationship with the government troops, because sometimes they came into conflict with each other. But the commander Park tried to unite with the magistrate of the city, Bae Ung Kyoung(裵應경). He offered medals for his distinguished military service to other civil servants, government troops, and volunteers. He thought only of the protection of Country and its dynasty.
In addition, he did not restricted military operation in Choeng-Do and took part in a battle in neighborhood area with another volunteer troops together. The corps built a united front with the troops under Choi Mun Byoung(崔文柄) in Ja-In(慈仁). Especially successful were the combined operations in Du-Gok(杜谷), Sun-Am-Gu(仙巖口), and Dong-Gok(東谷), where they attacked the major Japanese force in the rear. The corps launched later more than 60 times military operations independently.
But their movement were not properly estimated, especially because the corps have not been precisely studied. Although they carried out a great role for national defense in the power vacuum stage of the war, they were regarded as a small local troop, which acted independently only near around Choeng-Do. But it is now clear that the corps built a united front with another troops and participated even in the battle in Young-Cheon(永川) and Kyoung-Ju(慶州). As a result, what is evident is that the volunteer corps successful battles contributed to establish a defense system in the Gyeong-Sang left district near Dae-Gu(大邱), Milang(密陽) etc. and block the Japanese armies, which tried to move to their assembly place in Young-Cheon and Kyoung-Ju.

목차

Ⅰ. 서 론 = 1
Ⅱ. 壬辰倭亂과 淸道 義兵의 배경 = 6
1. 임진왜란 前後 시대상황과 청도의 상황 = 6
2. 朴慶傳 義兵家의 사회, 경제적 기반 = 11
Ⅲ. 淸道 義兵의 조직과 전개 = 15
1. 義兵의 모집과 조직 = 15
1) 의병의 모집 = 15
2) 의병의 조직 = 16
3) 군량의 조달 = 24
2. 의병과 관군의 연합 = 26
Ⅳ. 淸道 義兵陣의 전개와 활동 = 49
1. 義兵聯合戰線의 전개 = 49
1) 최문병 의병진과의 연합 = 49
2) 경주 서천전투의 연합 = 57
3) 기타 의병연합전투 = 61
2. 淸道 義兵陣의 활동 = 62
Ⅴ. 淸道 義兵陣의 공적과 의의 = 76
1. 淸道 義兵陣의 공적 = 76
2. 淸道 義兵陣의 의의 = 80
Ⅵ. 결 론 = 85
【附 錄】 = 88
1. 창의일기(장서기 김후생 기록) = 88
2. 조전일기(두암 이기옥 기록) = 101
【參 考 文 獻】 = 115
【ABSTRACT】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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