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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成雨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57호
발행연도
2025.3
수록면
173 - 209 (37page)
DOI
10.31218/TRKH.2025.3.15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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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조직된 독립의군부 사료 『遯軒遺稿』와 「管見」을 검토한 연구이다. 독립의군부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용되는 자료는 1957년 편찬된 임병찬의 문집『돈헌유고』와 『돈헌유고』에 수록된 「관견」이다. 『돈헌유고』의 底本은 아들 임응철이 편찬한 『遯軒集』이다. 임응철은 임병찬과 함께 태인의병과 독립의군부에 참여했다. 임응철은 임병찬이 독립의군부 활동으로 체포되어 1916년 거문도에서 사망한 후에도 독립의군부의 재기를 도모했으며, 1919년 3.1운동 후에는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했다 옥고를 치렀다.
임응철은 투옥되었다 풀려난 후 임병찬의 자료를 수집해 1925년 『遯軒集』을 편찬했다. 『돈헌집』은 한국학 호남진흥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국편 소장 『돈헌집』은 일제강점기 임병찬의 문집을 조선사편수회에서 필사한 것이다. 그런데 호남진흥원과 국편 소장 『돈헌집』, 『돈헌유고』가 체제가 다르고 내용이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은 1957년 『돈헌유고』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선택하고 내용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헌유고』는 사료 검토가 필요하며, 대표적인 것이 「관견」이다.
「관견」은 임병찬이 1913년 11월 작성한 독립의군부의 방략이다. 「관견」도 호남진흥원과 국편 소장 『돈헌집』, 그리고 『돈헌유고』의 수록본이 다르다. 국편 소장 『돈헌집』은 한문본, 호남진흥원 소장 『돈헌집』과 『돈헌유고』는 국한문을 수록했다. 그런데 『돈헌집』과 『돈헌유고』는 독립의군부 활동 당시 작성된 「관견」을 수록하지 않았다. 「관견」은 후손과 규장각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후손과 규장각 소장 「관견」은 독립의군부 활동 당시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후손과 규장각 소장 「관견」에는 대한독립의군부 단체명의 전거인 ‘대한독립의군부관제’라는 제목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대한독립의군부라는 단체명은 『돈헌유고』 편찬과정에서 만들어진 단체명인 것이다.
독립의군부는 다양한 방략을 수립하고 있었고, 일차적인 방략은 거병이었다. 그런데 「관견」은 임병찬의 견해이고, 이것은 독립의군부 지도부와 협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작성되었다. 임병찬은 자신이 구상한 「관견」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지도부와 협의가 필요했고 1914년 봄 상경했다. 임병찬은 1914년 3월 독립의군부 대표를 선정하고 「관견」을 바탕으로 부원확보와 자금모집을 추진했으나 1914년 5월 체포되었다.
「관견」의 핵심은 장서투서운동이다. 그러나 독립의군부의 목적은 ‘復國’이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략은 ‘擧兵’이었다. 독립의군부는 ‘거병·시위·장서투서’를 추진했고, 임병찬은 이러한 방략 중 장서투서를 실행하기 위해 「관견」을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독립의군부를 장서투서운동·향약실시운동 등 以文制武의 방략을 추진한 단체로만 파악하는 것은 再考되어야 한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林應喆의 독립운동과 『遯軒遺稿』의 편찬
Ⅱ. 「管見」을 통해 본 獨立義軍府 명칭과 성격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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