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지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저널정보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74호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527 - 562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凡民에 대한 교육을 공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중종대 이래 童蒙學의 전통을 재건하려고 실행된 영조대 동몽강 의례를 살펴본다. 영조 즉위 당시 활발한 동몽교육의 기억은 17세기 후반에서 멈춰 있었다. 각 童蒙敎官들이 가르치는 학생 수는 3~15명에 불과했고, 동몽교관은 6품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로만 여겨졌다. 귀한 집 자제일수록 동몽교관에게 가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국가의 동몽학은 침체되었다. 영조는 우선 동몽예강 복구를 시도했다. 동몽예강은 동몽교관이 실행하는 아동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한 제도이다. 각 동몽교관들이 가르치는 아동들과 함께 예조에 오면, 배강과 제술을 통해 아동들을 시험했다. 1743년(영조19) 동몽예강을 한달에 한번씩 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예강 복구 이후에도 동몽학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가 개선되지 않았을 때, 영조가 선택한 것은 親臨童蒙講 의례였다. 친림동몽강은 1758년(영조34) 2월 창경궁의 거려청에서 처음 실행되었고, 영조 재위 기간동안 총 41회의 친림동몽강 의례가 열렸다. 국왕이 선도하는 특별한 의례는 동몽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어린 생도들이 교관에게 가 배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교관들도 착실하게 강학을 실시하게 되었다. 영조대 친림동몽강 의례는 정조대로 이어졌다. 凡民까지 포괄하는 교육에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은 지속되었지만, 교육입국에 대한 이상은 포기되지 않은 채 19세기의 과제로 남겨졌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