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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찬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8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101 - 155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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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오동진의활동과 의의를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오동진은 1889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1908년 대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오동진은 의주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그는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임시정부 안창호와의 인연을 바탕 으로 1920년, 임시정부가 주창한 독립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광제청년단 단장, 대한청년단연합회, 광복단 부단장, 광복군총영장을 역임하며 지속적인 의열투쟁에 가담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진영 간의 연계 역할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임시정부와의 연계가 불가능해지자, 그는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주의 노선과의 접촉을 위해 극동민족회의에 참여하며 무장투쟁운동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서간도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위해 양기탁을 경성에서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통의부에 합류하여 교통부장과 재무부장, 그리고 군사령장을 역임하였다. 통의부 내 청년들의 강력한 지지를 통해 지도자에 올라선 그는 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군사위원장을 역임하며 조직적인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재만한인의 자치에도 힘을 기울여 유한농업공사, 농민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하여 재만한인의 생활여건 전반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점점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이 어려워지자 오동진은 사상적으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반항하는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인 고려혁명당 창설에 나섰다. 그러나 고려혁명당 단원 대부분이 체포되고, 오동진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1927년 12월 장춘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17년 간의 모진 옥중생활 끝에 1944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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