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준형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13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87 - 119 (33page)
DOI
10.37331/JKAH.2024.03.113.8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부여융은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태자로, 멸망 이후에는 웅진도독으로 활약한 인물로 7세기 격동의 시기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이다. 637년, 부여융은 23세의 나이로 사신단의 대표로 파견되어 당과의 우호를 닦고, 태종에게 비단 도포와 채색비단 3천 段을 받는 등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얻고 귀국하였다. 이는 부여융이 외교무대에서 활약한 첫 번째 활동이었다. 부여융은 의자왕이 지방 巡撫나 親征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 국정의 공백을 대신하는 監國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644년에는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계승권자로서 국정 운영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이후 부여융의 행적은 660년 나 · 당군의 백제 침공에서 확인된다. 예상보다 빠른 나 · 당군의 진군으로 백제의 군사적 대응은 실패로 돌아가고, 당과의 외교적 교섭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부여융은 태자로서 대당 교섭을 지휘하는 등 대당 교섭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신라를 고려하지 않은 협상 전략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군사와 외교적 대응이 모두 실패로 끝난 후, 나 · 당군에 의해 사비성이 포위당하자 의자왕과 대신들은 웅진으로 피난가게 된다. 오방성을 비롯한 지방의 군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동원하여 막고자 한 것이다. 부여융은 지방군이 수도로 진군하는 시간을 벌고, 사비성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비성에 남아 수도를 방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이 떠난 사비성 내부의 동요를 막지 못하고, 사비성에 남은 사람들은 항전을 이어가야 한다는 측과 항복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게 되었다. 결국 항전을 주장하는 동생 태의 쿠데타로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부여융은 아들 문사와 함께 사비성을 나와 나 · 당군에 항복하였다. 신라는 백제 멸망 이후 웅진도독으로 활약한 부여융의 위상을 축소시키고자 태자 경력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이때 부여융을 대신하여 태자로 기록된 인물이 바로 부여효였다. 부여효는 [外]‘王’으로 기록될 정도로 여타 왕자들과는 구분되는 위상을 가진 왕자였으며, 웅진성으로 피난간 의자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태자가 공백인 상황에서 약 5일에 걸쳐 실질적으로 태자의 역할을 수행한 왕자였다. 결국 『三國史記』의 “太子 孝” 기록은 이러한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태자 책봉 이전 부여융의 행적과 역할
Ⅲ. 나·당군의 백제 침공과 對唐 교섭
Ⅳ. 나·당군의 사비성 포위와 부여융의 항복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