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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석 (한성대)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83집
발행연도
2024.2
수록면
3 - 31 (29page)
DOI
10.18496/kjhr.2024.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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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에 의하면 안사의 난이 진행되던 시기에 일본은 발해를 통해 안사의 난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은 후 新羅에 대한 침공 계획을 세우고 절도사를 임명하는 등 나름의 군사 준비에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발해와는 관련 정보를 공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국이 동시에 신라를 협공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소위 신라 협공론이 유포되어 있으며 특히 일본 학계에서는 유력한 통설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신라 협공론의 연구사적 계보와 그 사료적 근거를 재검토하여 결론적으로 신라 협공계획은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협공이란 판단에 이르게 한 것으로 제시된 발해-일본 양국의 전략적 판단(구상)의 존재, 둘째 협공 계획의 성립을 사료적으로 검출하여 확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치중하였다.
먼저 이러한 구상에 이르게 한 배경의 하나로서 언급되는 <당의 혼란이 신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전략적 판단> 부분에 주목하여 검토하였다. 즉 당이 국내적으로 반란-전쟁 등으로 혼란하게 되면 신라가 공격받아도 도와줄 수 없기에 신라는 고립무원의 불리한 처지에 빠지게 되며 따라서 안사의 난 시기인 지금이 침공의 최적기가 된다는 논리적 판단의 설정이 그것이다. 이 설정은 1920년대 和田軍一의 논문에서 제기된 것인데 본고의 검토 결과 당시 일본의 당에 대한 태도는 唐使 심유악 건에서 보듯이 매우 순종적이었다는 점만 확인 가능할 뿐임을 지적하였다. 사료적으로 확인되는 발해의 입장 또한 친당(조정)적이었으며 특히 小野田守를 통해 당이 발해에게 준 칙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 점은 발해가 자신의 친당적인 입장을 일본과도 공유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발해가 당의 혼란을 틈타 신라를 침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안사의 난을 주시하고 있던 당시 신라, 발해, 일본 삼국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반란군의 잔당 등이 자국의 영토로 침입해 오는 상황이었음 또한 사료적으로도 확인 가능하였다.
아울러 신라 협공의 성립에 관해서는 현재 그것을 입증해주는 명확한 사료가 없는 상황인 점을 고려하여 우회적인 방법으로서 기존의 협공론에서 제기되었던 묵계의 성립 시점을 검토하였다. 하나는 小野田守가 일본의 專使로서 발해에 파견되었을 때 성립했다는 설과 또 하나는 귀국하는 小野田守와 함께 일본에 온 양승경과 등원중마려 사이에서 성립했다는 설인데 본고에서는 모두 성립하기 어려움을 논증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신라 협공〉론의 논점
3.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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