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병준 (이화여대)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52호
발행연도
2023.12
수록면
167 - 200 (34page)
DOI
10.31218/TRKH.2023.12.152.16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김규식은 고종이 총애하던 개화 인사이자 대러 외교를 담당했던 김용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의화군의 도미 유학을 조력하는 통역 겸 시종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김규식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고종과 관계를 통해 근대 세계와 접촉했으며, 전통적 국왕 중심의 세계를 통해 근대 세계로 나아갔다. 김규식은 미국 로녹대학 재학 중이던 1900년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주미 공사관에서 일했으며,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 중 한 명으로 포츠머드강화회담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관 · 밀사로서 김규식의 활동은 1919년 이후 파리강화회의 특사외교의 경험적 근거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김규식의 근대 세계와 외교 노선은 고종과 전통왕조의 영향 속에서 성장 · 변화한 부분이 있었다.
의친왕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모친 장씨는 민왕후의 미움을 받아 죽었고, 외가나 정치적 의지처가 없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으로 추방되었고, 1906년 귀국할 때까지 11년 가량을 일본과 미국에서 지내야 했다. 김규식과 함께 로녹대학에서 지낸 바 있다. 의친왕은 조선의 왕위계승자 중 가장 오랜 해외 생활과 유학경험을 통해 근대 세계에 정통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국내와 일본에서 의친왕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소문이 팽배하자 고종과 엄비는 의친왕의 귀국을 막았고, 이미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의친왕 역시 장기적 미래를 도모하기 어려웠다. 일본과 미국에서 학업에 뜻을 두지 못했다.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사실상 몰락하는 순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의친왕은 대한제국의 강제병합 이후에야 왕실 인물 가운데 가장 유력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김규식과 의친왕의 배경
Ⅱ. 1897년 의화군의 도미 유학 결정과 언더우드 · 김규식
Ⅲ. 1897∼1898년 미국에서 의화군과 김규식
Ⅳ. 1900∼1906년 미국에서 김규식과 의화군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