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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정수 (건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52호
발행연도
2023.12
수록면
7 - 47 (41page)
DOI
10.31218/TRKH.2023.12.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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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인(仁), 천하대의(天下大義) 간취, 강직한 언론관과 군군 신신의 정명(正命) 등 가풍을 이으면서 정명사상과 언론관, 고구려계승의식, 영토의식, 애민의 천명의식, 자존의식 등을 갖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서희 가문은 세가(世家)가 되었다. 또 서희는 성종 당시 국제 정세가 거란중심으로 재편되는 형세를 읽었다. 그렇지만 거란의 대송 전쟁에 고려가 주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거란의 대여진 정책을 통해 파악했다. 고려의 친송정책은 거란에게 부담이 되었고, 거란의 고려 침공이 이로 인해 결정되었다. 서희는 거란과의 화친을 주도했다. 그리고 강동 6주 축성을 전개해 영토의 획정과 함께 조빙로를 만들었다. 서희는 강동 6주 구축 후 강외로의 진출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성종은 거란 사대를 긴급 결정했다. 서희는 이에 대해 뜻이 달랐지만 축성을 주도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성종은 송과의 군사연합을 꾀해 거란의 의심을 샀다. 이에 거란은 성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면서도 ‘소인지모’를 언급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서희는 강동 6주에서의 축성을 마쳤으나 그와 동시에 병으로 돌아와야 했다. 성종의 거란 사대와 모순된 송에의 군사요청 등은 서희의 구상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강동 6주는 여진 문제의 해결, 거란 침략에의 방비, 강외 지역으로의 진출 교두보 확보라는 의미가 있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세가(世家)로의 성장과 서희의 사상
Ⅱ. 대거란 전쟁 전개와 서희의 역할
Ⅲ. 전후 처리와 서희의 강동 6주 축성 의미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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