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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경호 (공주대학교)
저널정보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해양문화재 해양문화재 제18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7 - 3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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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원말명초 고려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사신의 항로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세 시기로 나누어 살피고자 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명 건국 이후 하평촉사賀平蜀使로파견된 정몽주 일행이 난파된 1372년 겨울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1373년 정몽주 일행이 돌아온 후 조공으로 바치는 말과 공물의 양을 둘러싸고 양국의 갈등이 심화되었던 1384년까지이며, 세 번째 시기는 우왕이 명의 책봉을 받고 요동을 경유하는 것을 허락받은 1385년부터 명이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는 1387년까지이다. 첫 번째 시기 개경에서 금릉으로 이어지는 사행로는 황해 남부사단항로였다. 고려 사신은예성강의 벽란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서남해 연안을 경유한 후 절강의 영파에 도착한 후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금릉에 도착했다. 그러나 벽란도에서 영파를 오가는 고려의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자 고려는 명에 꾸준히 요동을 경유하는 길을 이용하게 해달라고요청했다. 두 번째 시기는 명이 요동 점령을 본격화하면서 고려에 공마를 본격적으로 요청한 시기이다. 명은 고려에 제주마 2,000필을 요구하고, 요동을 경유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채빈 등이 고려에 파견되어 말을 거두어가려 하였으나 제주에서 목호들의 난이 일어나 시일이 지체되었다. 그런 가운에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명 사신 채빈도 귀국 도중에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교류도 일시 중단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가앞서 요구했던 요동 경유로를 일시적으로나마 이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우왕이 명의 책봉을 받고, 본격적으로 요동 경유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된 시기이다. 사행로 측면에서 보면 요동-산둥-금릉 항로가 정착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영락제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고려는 이 항로를 이용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요컨대 고려에서 명으로 가는 사행로는 명이 요동을 장악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황해 남부 사단항로를이용하다가 명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요동을 경유하는 항로로 변화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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