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미선 (명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한국사상사학 제73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1 - 33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논문은 신라의 재해 대응책이 유교적 천인감응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유교적 천인감응설에 따른 재해 대책으로 언급되는 사(赦)와 시중(侍中)의 교체를 중심으로 그 관련성을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신라 재해 대응책의 특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먼저 사면의 경우,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 상대에는 녹수(錄囚), 여수(慮囚), 곡사(曲赦) 등 세분화되어 시행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천인감응설에 따라 가뭄의 대응책으로 녹수를 단행한 것은 북위(北魏) 효문제 때였다. 그러므로 신라에서 이러한 녹수를 받아들여 재해 대응책으로 썼다면 그것은 적어도 6세기 이후가 되어야 한다. 다만 일찍이 제천행사에서 ‘형옥을 단행하고 죄수를 풀어주기[斷刑獄 解囚徒]’도 했으므로, 사면이 반드시 유교적 천인감응설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통일 후에는 녹수라는 표현보다 사・대사로 표현되는데, 이는 신라 전체가 하나의 영토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통일기 재해 발생 시점과 사면 시기 사이에 시간 차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의 사면은 재해로 인해 부득이하게 죄를 짓게 된 백성에 대한 사면일 가능성도 있으며, 사면 또한 천인감응설에 입각한 의례적 행위가 아니라 진휼과 같은 실질적인 대책이기도 하였다. 신라통일기에 재해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새로운 양상으로 ‘시중의 교체’가 주목되어 왔다. 재해가 심했던 성덕・원성・헌덕왕대 시중의 교체를 살펴본 결과 재해가 발생함에도 시중의 직을 유지하고, 재임 기간이 길었던 시중들이 재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존재들이었다. 오히려 재해와 관련하여 시중이 교체되는 것은 천견(天譴)에 책임지는 태도이기보다 재해를 극복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시중 교체가 잦은 경우 재해 대응능력이 떨어져 왕권이 약화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사면이나 시중 교체가 유교적 천인감응설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 연구에서 밝힌 바와 같이 6~7세기 유교이념이 신라에 수용되고, 통일 이후 정치이념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 유교적 천인감응설이 재해 대응책에 담기기도 하였다. 다만 사면이나 시중 교체가 천인감응설과 관련 없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러한 비교 분석 과정에서 신라 재해 대응책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재해의 종류에 상관없이 기근이나 백성이 굶주리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대부분 진휼이 단행되었다. 재해 자체보다 재해에 대한 진휼의 여부가 그 사회의 안정성 및 왕의 통치력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으며, 경문왕 이후 진휼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재해에 대응할 수 없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는 진휼 외에 산천제, 시조묘 제사, 용을 그려 강우를 기원하거나 불교 법회를 통해 재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등 다양한 대응책이 시도되었다. 이는 신라의 재해 대응책이 체계화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재해에 대한 왕을 비롯한 통치자의 판단에 따라 그 대응책이 선택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므로 유교적 천인감응설을 잘 보여주는 ‘피정전(避正殿)’, ‘감상선(減常膳)’ 등 군주의 행위를 통제하는 방식은 단편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