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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정철 (한양대학교) 황보경 (세종대학교)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91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95 - 12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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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산성은 2000년에 처음 발견된 둘레 382m의 산봉형 산성으로 三國時代 安山 일대 관방체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최근에 이루어진 시굴조사를 통해서 성벽의 축조 상태를 알 수 있었고, 토기와 기와도 출토되어 축성 시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성태산성의 축성 시기는 6세기 말~7세기 전반으로 판단되는데, 둘레와 축조기법은 양천고성지와 유사한 점이 많지만, 자미산성에 비해서는 다소 늦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태산성의 축성 목적은 553년 新州 설치 이후 西海岸을 통한 입출항과 육상 교통로를 감제 및 통제하기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천과 화성 사이에 위치한 안산 해안은 최전선을 지원하고, 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내륙으로 이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신라는 564년부터 중국과 외교를 하기 위해 항구의설치와 당성 1차성을 축성하면서 그 주위에 방위성을 쌓아 관방체계를 구축하였다. 아울러 한강 본류역과 인천, 김포, 안산 지역에도 소규모의 산성을 축성하여 한강 하구와 경기만 일대의 안정화를 도모해 나갔다. 특히기존의 대중국 외교 질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해 왔던 반면, 6세기 중~후반 사이에는 신라도 독자적으로외교활동을 개시하면서 서해의 制海權 확보는 이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이에 신라는 경기 남부지역과 경기만 일대 해안에 많은 성곽을 축성하면서 대응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안산 일원이 당성과 호암산성을 잇는 간선도로의 중간지점에 해당되어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전반 사이에 성태산성의 축성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결론적으로 성태산성은 신라의 대중국 외교활동과 관련되어 축성되었고, 안산 해안과 광명, 수원 일원으로통하는 교통로를 감제 및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해를 통한 신라의 대중국 외교행보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큰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따라서 삼국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기만 일대에서의 감시와 충돌이 발생되었다. 이에 신라는 해안과 인접한 내륙에도 중소규모의 성곽을 축성하여 경기·남양만을 사수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안산 해안과 육로를 방어하는 관방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성태산성을 비롯한 성곡동성과 군자산성 등을 거의 동시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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