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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영교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90호
발행연도
2023.1
수록면
79 - 102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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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唐太宗의 전쟁 목적은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安市城에 가로막혀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았지만, 필자는 그 해답을 唐수군에서 찾아보았다. 고구려 침공을 결정한 황제는 사람들의 수고를 줄이기 위해 강과 바다를 통해 보급품을 수송하려고 했다. 幽州(북경)에서 遼河 사이의 2천리 구간을 행군해야 하는 황제 직속의 六軍 6만은 해안 길을 선택했다. 河北道 의 식량들을 선적한 600척의 배들이 해안을 따라가면서 六軍에 보급을 했다. 645년 5월 2일 唐수군이 卑沙城을 함락시켰다. 이후 그 요새는 唐軍의 군수기지로 활용되었다. 山東 萊州 에 집적된 糧米·武器가 卑沙城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고구려의 여러 지역(건안성 ‧ 요하 ‧ 평양 ‧ 압록강)으로 수송이 가능했다. 병력도 그러했다. 5월 唐수군 사령관 張亮은 卑沙城에서 建安城으로 이동했다. 그 요새를 공격하던 張儉의군대가 遼東城의 南面 공격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수군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수군은 육군을 보조하기도 했다. 한편 資治通鑑 641년 8월 10일 기록에 황제의 고구려 침공전략이 보인다. 황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遼 東을 공격하면 고구려의 다른 여러 城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고, 고구려의 병력이 대부분 遼東에 몰리면唐수군이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직공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황제 자신과 唐육군은 고구려의 병력을 遼東으로빨아들이는 미끼이자 흉기였다. 645년 6월 21일, 연개소문은 駐蹕山 전투에 평양의 병력을 중심으로 전국각지에서 차출한 15만의 병력을투입했다. 고구려 수도의 방어가 약해졌다. 황제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23일 唐軍이 고구려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 시점에 唐수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공격하거나, 대동강에 보급거점을 구축하고 있어야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평양으로 항해하던 張文幹 등이 이끄는 唐함대가 대부분 침몰했다. 황제의 향후 작전계획이 어그러졌다. 6 월 23일 駐蹕山 전투 직후 고구려가 공황 상태에 빠진 바로 그때 황제의 군대가 평양으로 진군해야 했지만그렇게 할 수 없었다. 612년 해상보급을 맡은 隋수군이 평양에서 궤멸되어 그곳으로 진군하던 隋육군 30만과연결되지 못했고, 육군이 후퇴는 과정에서 전멸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45년 5월~6월 唐太宗은 고구려에서 遼東城 ‧ 白巖城 ‧ 卑沙城 ‧ 蓋牟城을 함락시켰고, 무엇보다 駐蹕山에서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唐수군의 배들이 전복되면서, 전쟁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 645년 11월에 황제는임무 수행에 실패한 수군 총관 張文幹을 주살했고, 이듬해 3월에 수군 총사령관 張亮을 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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