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광연 (동국대)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92집
발행연도
2023.9
수록면
5 - 36 (32page)
DOI
10.18399/actako.2023..92.00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에서는 십일면관음, 천수관음으로 대표되는 변화관음이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의 신라에서는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그 이유를 당과 신라의 불교문화의 차이 속에서 찾아보았다.
선행 연구에 의하면, 당에서는 현장이 『십일면심주경』은 한역한 이후인 660년대부터, 신라에서는 680년대부터 변화관음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장을 보완하기 위해 거론한 문헌 자료들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당에서 변화관음의 출현은 690년 무측천이 황제를 표방한 이후이고, 현존하는 십일면관음상 및 『삼국유사』의 분황사 천수관음 사례를 볼 때, 신라에서 변화관음이 등장한 것은 8세기 중엽 경덕왕대(742-765)인 것 같다.
나당 전쟁 이후 신문왕(재위 681-692)~성덕왕(재위 702-737)의 통치 시기에 신라는 당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불교문화의 유행에도 민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사회에서 변화관음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를 당과 신라 사회에서 불교문화의 위상의 차이, 국가와 불교계의 관계의 차이, 그리고 전쟁 이후 신라 사회에서 불교계에게 요구한 역할의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당과 신라의 변화관음 사례
3. 당과 신라의 변화관음 등장 시기
4. 신라에서는 왜 변화관음이 성행하지 않았을까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151-24-02-088079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