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상수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67輯
발행연도
2023.8
수록면
251 - 284 (34page)
DOI
10.37981/hjhrisu.2023.8.67.25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882/84년 서구 열강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은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것은 갑신정변, 거문도 사건, 조러밀약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조선의 상황을 관찰한 독일 관료들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본 논문의 헥심 주제이다. 당시 독일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과 달리 한반도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적었기 때문에 중립적이고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고찰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관직을 보유하고 있었던 묄렌도르프를 비롯해서 서울에 주재하고 있었던 독일 현지 외교관인 쳄브쉬와 부들러는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채결한 이후 조선의 독립과 중립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 주재 독일 공사 브란트는 조선에서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베를린 외교부에서도 발생했다. 조선의 독립을 강조한 독일 외교부 장관 하츠펠트와 독일과 청국의 유대 관계를 중요시했던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가 대립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하츠펠트를 해임시켰다.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이 대립한 조선은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면서 고종의 정치적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청일 양국의 동시 철수라는 텐진 조약 이후에도 청국은 한반도에서 계속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청국은 영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강조했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조선의 대내정치에 열강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위안스카이-베베르 합의를 통해서 해결되었다. 이 합의는 문서로 작성되지 않았고 구두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향후 청일전쟁이 발생할 때까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시켰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갑신정변
3. 거문도 사건
4. 조러밀약설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