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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관식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28호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62 - 113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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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239호 〈송시열 초상〉은 문제적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제작 시기에 대한 편년이 연구자마다 달라 17세기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기도 하고 18세기 초반이나 후반으로 보기도 하는 등 편차가 커 혼란이심한 편이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 1607-1689) 45세 때인 1651년에 화양서옥(華陽書屋)에서 썼다고 하는 화면 오른쪽 상단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 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1778년 3월에 송시열의 영정에 치제하며 썼다는 화면 상부의 어제(御製) 절구(絶句)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탁하여 써넣은 것이다. 왜냐하면 화양서옥은 송시열이 60세 때인 1666년에 세워져 1651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가 화상자경을 쓴 것은 77세 때인 1683년에 한시각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가 1778년 3월에 썼다는 어제 절구는 본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1707년 7월에 정몽주(鄭夢 周, 1337-1392)의 영정에 치제할 때 쓴 것이나 훗날 송시열 추숭 사업을 가장 많이 벌인 정조의 어제로 와전되어 이와 같이 써 넣은 것이다. 가탁의 시점으로 설정된 1778년은 정조가 송시열을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묘정에 배향한 해이고, 3월은 명 의종(毅宗, 재위 1628-1644)의 기일인 3월 19일에 만동묘에 제향할때 부근의 화양서옥이나 화양서원에 봉안된 송시열의 영정에도 같이 제향했던 의미 있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선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이 국보 〈송시열 초상〉은 가장 이른 시기의 사실적 모습을 전해 주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송시열 초상과 비교할 때 용모가 많이 다르며 이상적인 귀인의 상으로 고쳐 그려진 것이다. 또한 심의와 복건의 도상이나 화법도 17세기의 평면적이고 고졸한 조형에서부터 18세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조형은 물론 19세기 초의 다소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의고적 조형까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적 현상과 특수한 요소들은 근본적으로 18세기 중·후반 이후 송시열에 대한 추모와 숭배 의식이 고조되며 송시열의 초상을 의도적으로 이상화시켜 이모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상화 현상은 문자와 이미지의 양면에 걸쳐 전면적으로 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국보 〈송시열 초상〉의 가장 고유하고 핵심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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