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내포 출신의 동학농민군 문양목이 미국에서 벌인 민족운동과 그의 사회·경제적 생활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방법은 신문과 정보문서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주제별로 연대기적으로 고찰하는 방식이다.
이 연구의 내용은 첫째, 문양목의 동학농민운동과 그가 미주에 건너간 배경을 검토하였다. 둘째, 그가 1905년 미주에 건너가 대동보국회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벌인 민족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셋째, 그의 가정생활과신앙생활과 경제생활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860년대 후반 서산에서 태어난 유교적지식인 문양목은 조선의 부패를 개혁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1894년 무렵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그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제2차로봉기하였을 때 서산, 해미, 공주 등지에서 박희인·문장로·문장준의 지휘를받아 동학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후 인천으로 도피한 그는 개신교 선교사와 신자 등을 통해 미국 등 서양 사정을 이해하고, 1902년 말 이후 추진되던 하와이 이민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5년 하와이에 이주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1년 정도 노동을 한 그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그는 1907년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로 발전시킨 후 회장이 되었다. 그는 박용만의 활동을 후원하고, 스티븐스의 친일행위를 비판하고, 전명운·장인환을 구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동공보사의 사장으로『 대동공보』를 발간하여 보황의식과 국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식을 고취하였고,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을 발간·판매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2월 국권 피탈을 예견한 그는 보황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대동보국회와 대한국민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시켰다. 이후 그는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활동 자금을 모으고『신한민보』에 기고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사탕무우를 재배하기 위하여 맨티카로 옮긴 그는 이곳에서 농사를지으면서 맨티카지방회 대의원, 스탁튼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북미지방총회의 대표 대의원 중앙총회에 참석하여 주요 의안을 결정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1930년대 독립운동가와 그 유족을 돕고,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중국인 위문을 통한 공동항일전선의 결성 등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0년 사망하는 그 순간에도 문양목은 조국의 독립을 잊지 않았다.
문양목은 동학신자였으나 미국에 가서는 기독교를 믿고 활동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여 이 교회와 그 출신의 목사인 황사용·황사선·임정구 등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맨티카, 스탁튼에교회를 세우고 그 지역의 한인들과 함께 신양생활을 하였고, 또 함께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문양목은 미국에서 아주 곤궁하지는 않지만 힘든 생활을 하였다. 그는1910년대 중반부터 맨티카, 스탁튼 등지에서 사탕무우와 벼농사 등을 재배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런데 이를 통한 소득은 그리 크지 않아서 그는 때로는 직업 소개, 중국 신문 교정 등의 일을 하여야 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 문찬성도 생계에 보탬을 주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세탁소를 경영하기도하였다.
문양목이 민족운동에 전념하여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양목의 자식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였다. 장남인 문덕소와 삼남인 문한소는 어려운 여건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특히 문한소는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군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national movement and social and economic activities in the Americas of Moon Yang-Mok, a Dong-hak believer. I examined his Donghak Peasant Movement in Nae-Po 1894 and the national movement on Dae-dong-bo-gook-hoe and Dae-han-in-gook-min-hoe of him in the Americas. And I reviewed his family life, religion, and economic life. He, who was born in Seosan of present Taean<<삽입>>, the late 1860s, joined in the Donghak about 1894. He conducted the Second Donghak Peasant Movement, led by Park Hee-in and Moon Jang-ro and Moon Jang-jun. He moved to Hawaii in 1905 shortly after the advent of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 And he worked in Hawaii for about a year and moved to San Francisco in 1906. He founded the Dae-dong-bo-gook-hoe in 1907 and became the president of this. He supported Park Yong-man and made efforts to revive Jang In-hwan and Chun Myung-woon. He combined Dae-dong-bo-gook-hoe and Dae-han-gook-min-hoe, and founded Dae-han-in-gook-min-hoe in 1910. As a member of this, he made efforts to unite Koreans in the Americas and collected money, and imbue Koreans a mind with patriot in San Francisco and Mantica, ect. In 1930s he worked to promote the Chinese of America anti-Japan spirits. Even at the moment of death in 1940, Mun Yang-mok did not forget the independence of the fatherland. Although Moon Yang-mok was a Donghak believer in Korea, he became a Christian in America. He attended the Methodist Church in San Francisco, and made friends with Hwang Sa-sun and Im Chung-goo, a pastor of the church. Along with them, he founded the church in Mantica of California and lived asa Christian. Moon Yang-mok was poor. He cultivated sugar canes and rice. But his income was not so great, so he had to do jobs such as correction of Chinese newspapers. And his wife, Moon Chan-sung, also ran a laundry shop in San Francisco. Even though Moon Yang-mok devoted himself to national movement and did not take care of their children financially, the children of Moon Yang-mok succeeded in by their efforts. The eldest son Moon Deok-so and the third son Moon Han-so studied hard in spite of difficult circumstances and became a doctor. Especially Moon Han-so joined the U.S. military in order to support Korea’s indepen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