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형진 (천도교 종학대학원)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43호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7 - 44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동학농민혁명 이후 의암 손병희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끈질기게 추적하는 정부의 추적을 피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지명받은동학 교주로서의 역할이 막중했었다. 그에게 부과된 의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어떻게 해서든지 동학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함은 물론 그 불꽃이 널리 퍼지게 해야 했다. 두 번째는 동학농민혁명의 과정과 이후 도피생활을 하면서 목격한 변화된 국내외 정세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의암이 동학 포덕을 위해 손을 내민 지역은 북쪽지역이었다. 북쪽의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동학을 포덕하자 다시금 동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불씨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르자 동학도들은 다시 전국적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거의 강제로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였다. 의암은 이 순간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시금 뒤떨어지게 될 것을 직감하고 미국 등세계를 알아야겠다고 판단하였다. 의암의 일본 망명은 이러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그가 본 것이 바로 개회된 모습과 근대화된 일본 국민들의 높은 개회의식이었다. 이제 의암의 관심사는 동학을 근대적 종교화하고 나아가대한제국을 혁신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었다. 당국에 건의하는 정책 건의서는물론 갑진개화혁신운동이나 동학을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고 이후 전개된 천도교의 문화운동 등은 모두 의암의 문명개화로의 자각과 인식의 변화로부터출발했다. 이와 같은 의암의 인식변화는 일본 체류 이후에 발생한 것들이었다. 이는그동안의 봉건적 구질서 하에 있었던 의암의 의식이 세계와의 조우 끝에 문명개화야 말로 당시 조선을 구할 유일한 방법론이라는 인식의 일대전환이었다. 불과 10여년 전에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외치던 동학이 한 순간에 문명개화의 주역이 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의암 손병희의 의식전환에서 출발했다. 비록 결과는 무능한 지도층과 어쩔 수 없는 국력의 차이로 인한 식민지화였지만 그래도 근대화에 뒤진 조선이 조금은 개화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화혁신의 실천은 꾸준히 전개되어 1919년 세계를 놀라게 한3.1운동으로 귀결되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