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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만호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67호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41 - 6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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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長城 지역의 南門倡義에 대한 기억과 그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장성은 임진왜란 7년 기간 동안 지역 차원에서 세 차례나 倡義를 한 보기 드문 지역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장성 지역은 전란의 병화를 고스란히 안게 되었고, 결국 인근의 珍原과 통합되어야 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지역의 임진왜란 특히 남문창의에 대한 기억은 타지역과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장성 지역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남문창의를 본격적으로 기억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698년 ?以中의 후손인 ?烋가 『鰲山名人錄』을 작성한 바 있지만 그곳에는 남문창의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1794년 倡義祠를 건립, 1799년 『南門倡義錄』 발간, 1802년 南門倡義碑 건립 등 단기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남문창의를 기억하고 현창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 내에서 어떠한 변화의 계기가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본고에서는 그 계기를 1796년 金麟厚의 文廟配享에서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의 남문창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김인후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그의 문묘배향을 正祖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정조는 비슷한 시기에 金德齡과 梁大樸 등 호남 출신의 임진왜란 의병장들을 추숭한 바 있고, 1798년 광주에서 功令科를 실시하게 하여 변이중과 김인후의 후손들을 챙겼다. 즉, 장성 남문창의를 주도한 자들의 후손들은 김인후의 문묘배향을 계기로 남문창의를 본격적으로 기억하고 현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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