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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용건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88호
발행연도
2021.9
수록면
99 - 148 (5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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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사회에서 ‘광해조 절신’으로 기억된 인물들의 면면과 그 사적 형상화 양상에 대해 살핀 글이다. 조선은 유교적 국가관을 표방하며 세워진 나라였던만큼 건국 초기부터 유가 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忠’을 강조하였고, 군신 간의 의리를 중시한 역대 인물을 지속적으로 기억?현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節臣’에 대한 관심은 ‘昏君’이라 일컬어진 光海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광해조 절신’의 존재 양상을 ‘柳夢寅과 北人系 인물’, ‘金?’, ‘金興國’ 등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은 北人, 南人(金?), 西人(金興國) 등 각기 다른 당파 출신으로 仁祖反正 당시에도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의리를 지킨 방식 역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들을 절신으로 높이고자 한 주체와 그 시기 및 방법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변별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각 인물에 따라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절신 현양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 역시 일정하게 존재하였다. 먼저, 이들에 대한 추숭 작업이 시기적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각 인물들은 대체로 17세기 이래 절신으로서의 점진적인 기억 과정을 거쳐 문인 사회에서 ‘광해군을 위한 충신’으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그러한 노력이 최종적인 완성을 보았다. 다음으로, 이들의 절신 현양에는 정보의 추가?삭제?윤색 등 일정한 조탁의 과정이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김흥국은 18세기까지만 해도 광해군에 대한 절행의 내용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절신 서사를 부여받았거니와, 유몽인과 김령이 역사적으로 기억되어 온 과정을 추적해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특정한 일화와 사건이 조금씩 덧붙여지거나 제외되면서 보다 완정한 절신으로서의 모습이 조형되어 온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유몽인과 북인계, 김령, 김흥국 등은 그들이 가진 서로 다른 배경과 행적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사적 형상화 과정을 거친 끝에 19세기에 이르러 ‘광해조 절신’이라는 담론장 안에 느슨하게나마 포섭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군주의 明暗 여부에도 불구하고 신하로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광해군의 遺臣으로 후대적 인정을 받았으며, 나아가 절의의 상징 ‘伯夷’를 비롯하여 ‘吉再?死六臣?金時習?燕山朝節臣’ 등 동방 절신과도 그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유가 이념의 진작과 확립을 위해 조선만의 伯夷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조선 문사들의 의식 활동은, 이처럼 광해군 때의 신하들을 대상으로도 분명한 성취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고의 논의를 통해, 그간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광해조 절신에 대한 이해의 증진은 물론, 鄭夢周?吉再?死六臣?金時習 등 일부 인물만을 대상으로 언급되었던 ‘조선조 절신 서사’의 발굴과 확충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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