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수종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연구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0호
발행연도
2022.3
수록면
159 - 202 (4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1930년대 초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족농무연합회의 조직 배경과 과정 그리고 변화를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1920년대를 시작으로 북만주 지역의 한인은 1910년대에 비해 그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중동철도 인근 지역의 지리적 요인으로 수전 농업에 유리했던 점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한인의 열악한 경제 상황과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은 매우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적절한 대응책과 단체가 필요했다. 신민부 분열 이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김좌진이 사망한 뒤, 한족총연합회는 내외부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결국 1931년 1월 한족총연합회의 무장부대였던 별동대는 연합회를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별동대와 지방농무회 대표들은 1931년 2월부터 기존의 간부와 무정부주의 계열을 배제한 새로운 단체 즉 ‘한족농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계열이 포함된 구 간부들을 제외한 새로운 간부들로 단체를 구성하였다. 동시에 강령 속 조직의 구성원리 등에서 한족총연합회와 차이를 보였다. 한족농무연합회는 한족총연합회의 구 간부들에 대한 반감이 계기가 되어 결성되기는 하였지만, 단체 내에서 활동의 방향성과 주도권에 대해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한족농무연합회는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구 귀일당’과 ‘농민당’으로 분열되었다. 양 세력의 갈등 상황에서 주도권을 쥔 ‘구 귀일당’은 조직을 개편하고 ‘한 테러단’을 조직하였다. ‘한 테러단’은 농무연합회의 주도권을 쟁취한 이후 독자적인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군자금 모집 활동 중 간부들이 체포되고 한 테러단의 활동으로 인해 중국관헌들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 관헌의 탄압을 받은 한 테러단은 이후 구성원의 자수, 체포 등으로 더이상 항일운동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농민당 계열은 농무연합회 내에서 주도권을 잃은 이후 무정부주의 계열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해림 인근에서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수행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이 힘들어지고 주요 간부의 피체, 피살이 발생하여 결국 활동을 이어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