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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연구원 [Jthink] 전북학연구센터-전북학연구 전북학연구 2집
발행연도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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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하나의 연맹으로 이루어졌다는 학계의 학설은 근거가 없었다. 가야 즉 가라로 일컬어진 세력은 김해와 고령 세력에 불과했다. 11세기 경에 저술된 가락국기라는 역사책에 근거한 6가야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지는 못하였다. 가야 토기 공동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여러 나라들을 역사서에서는 ‘임나 여러 나라’라고 하였다. 임나라는 틀 안에 가라 등의 여러 나라가 존재했다. 임나 여러 나라의 공간적 범위는 낙동강유역과 그 서편, 그리고 남강유역을 포괄하였다. 그러한 임나여러 나라는 가야토기의 확산을 놓고 볼 때 소백산맥 서편을 넘어 전라북도 동부 지역과 전라남도 동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에서는 이 세력의 공간적 범위가 300리에 이르렀다. 이러한 범위 안에는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 목적의 봉화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단순한 일개 작은 나라 정도를 넘어 영역국가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봉화를 조밀하게 배치하여 침탈을 막고자 한 실체는 제철이었다. 「신찬성씨록」에서 “토지와 인민 역시 부유”하다고 한 요인은 왕성한 제철산업에 기반하였다. 이러한 ‘기문의 땅’에서 반파국은 신라와 더불어 끊임없이 다투어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말할 나위없이 이는 반파국과 신라, 두 개의 거대한 제철왕국 간의 철 산지 장악을 위한 패권 경쟁이었다. 지금의 장수 장계 분지에 소재한 반파국은 급기야 경제 물길이기도 한 섬진강 하구의 다사진 항구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백제 및 왜와 대립하였다. 결국 무력 충돌로 번진 이 전쟁에서 반파국의 존재는 「일본서기」에 존재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반파국은 궁극적으로 백제에 패하였다. 반파 국의 지배층 일부는 가라로 넘어간 후 이제는 가라가 다사진 항구에 대한 지배권을 탈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반파국을 가라와 동일시하는 착오를 유발하게 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국호 加耶와 加耶 單一聯盟說의 검증
1) 국호 ‘加耶‘ 검증
2) 加耶 單一聯盟說의 검증
3) 삼한의 總王 辰王
4) 加羅의 교류 확대
3. 전북가야의 대두
1) 반파국의 등장과 섬진강 수계 쟁탈전
2) 전북가야의 흥성과 세력권
3) 전북가야의 멸망 과정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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