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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순교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택민국학연구원 국학연구론총 국학연구론총 제15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95 - 326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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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에 의하면 대월 출신 李龍祥 Lý Long Tường은 고려 고종 치세에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이거했다.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한 그는 얼마 뒤 몽골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고려 조정으로부터 화산군에 책봉되었고, 화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대월 李氏 왕조의 혈손인 그의 존재는 한국베트남 양국 선린의 가교이자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李龍祥에 대한 정사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현존 화산 이씨 족보의 서문과 발문을 일별할 때, 고려 이래의 화산 이씨 족보마저 임진왜란 초기(1592~1593)에 산실되었다. 이후 대략 1706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1777년에 이르기까지 李枰과 아들 李憲國, 손자 李鼎新 3대에 걸쳐 화산 이씨 족보가 繼述, 복간되었음이 확인된다. 곧 李枰이 수습한 未完의 筆寫에다, 72년에 걸쳐 여러 사람의 노력, 蘊蓄이 보태어져, 大越(安南)에 출자를 둔 李龍祥의 구체적 가계가 복원되었다. 한데 1706년 李枰의 초보에서 李龍祥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며, 1777년 중수보에서야 드러난다. 이 점에서 1706년~1777년 사이의 시기에, 중국과의 교류 관계 속에서 전해진 대월의 사정이 반영되어 李龍祥이 창출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용상을 시조로 한 세계표가 성립되어 있었다면, 최초의 서, 곧 李枰의 글에 세보의 눈알이라 불러야 마땅할 이용상의 사적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李枰이 쓴 총 1권의 초보는 미완의 필사본 형태였고, 1777년에야 총 2권의 重修譜, 곧 임란이후 최초의 복간복이 간행되었다. 李永祚(82), 李憲黙(55), 李鼎新(52),李景行(47), 李羲之(41)등의 노력에 의하여 가계가 완성된 바, 중수보는 李枰의 초보와 연장선상에 있다. 李永祚는 座長, 李憲黙은 재정 지원, 李鼎新은 李枰의 손자로서 집안에 보관 중인 필사본 草譜 제공, 李景行은 鋟梓를 위한 재정적 조력, 李羲之는 重修譜를 직접 작성하며 産婆의 중핵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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