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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성을 (아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한국사상사학 제5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41 - 293 (5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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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신의 생애는 네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인 중종 말~명종 초기에는 매우 득의하여 신진기예로서 사림파의 입장에서 이기 등을 탄핵하였다. 둘째, 을사사화로 파직 당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다시 진도에 유배되어 20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 시기이며 이 때 학문이 대성하였다. 셋째, 선조 즉위 후 선조 5년까지의 시기로서 다시 관직에 나와 당시 선조 대 전배사림과 개혁, 특히 척신 정치의 청산 문제에 대하여 대경장의 입장에서 뜻을 같이 하는 시기이다. 이 때 전배사림과 구신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이 갈등의 조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넷째, 선조6년 우의정에 임명된 이후 정여립 옥사 직후 타계하기까지의 시기이다. 노수신은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갖고 국왕 선조에게 건의에도 하였으나 국왕은 전혀 개혁할 마음이 없었다. 이 때 사림이 전배사림과 후배사림으로 분열하여 서인과 동인이 되어 당쟁을 격화되는 가운데 노수신은 가장 중립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조정, 화합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다. 다음으로 노수신의 정치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내적인 면에서는 군주가 사적 입장을 떠나서 국가 공권력의 입장에서 대경장을 해야 하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하고 이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왕실의 재정 낭비를 줄이고 한정을 수괄하여 군비를 굳건하게 하고 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공납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셋째 대외적인 면에서는 왜적에 대한 군비를 강화를 주장하고 왜국으로의 통신사 파견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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