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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邊東明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택민국학연구원 국학연구론총 국학연구론총 제21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307 - 33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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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방죽은 무등산과 함께 광주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메워져 사라졌지만, 지금껏 지역민 사이의 대화에서 오르내리곤 하는 추억의 장소이다. 이 저수지가 수축된 것은 대략 임진왜란을 전후한 즈음이었다. 世宗代에 金倣이 축조했다는 설이 널리 믿어져 왔지만 근거는 없다. 그 무렵 경양방죽이 존재했음을 전하는 자료조차 찾기가 어렵다. 현재까지 파악된 기록에 근거하는 한, 경양방죽이 수축된 것은 16세기 후반 내지는 늦어도 1604년 이전의 어느 시기였다. 조선시기에 경양방죽은 국유 내지 공유의 수리시설이었다. 官의 주도 아래 지역 유력자들이 동원되어 지역민의 노동력을 투입해 광주 치소의 들녘 평지에 축조한 대형 저수지였다. 관개를 위시한 전통시기 저수지 조성의 일반적 목적에다, 邑底에 농토와 농민을 집적해 치소의 경제적 토대를 굳건히 함으로써 지역 유력자의 발호를 견제하고 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과 함께 場市 발달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적극 부응하려는, 광주지역 나름의 필요성이 더해져 축조된 수리시설이었다. 경양방죽은 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 관리와 운영은 지역사회의 자치에 맡겨졌다. 지주 중에서 2명의 監官이 그리고 작인 중에서 몇몇 監考가 선정되어, 수령의 감독 아래 경양방죽을 관리 운영하였다. 경양방죽과 연계 운영되던 棗灘洑의 洑契에 비추어, 경양방죽에 堤堰契가 꾸려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경양방죽은 때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대체로 필요한 만큼은 보수 유지되었으며, 마침내 메워져 사라질 때까지 광주 치소의 들녘을 적시는 수원이자 지역민의 휴식처로서 나름의 역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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