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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진현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중일어문학과 박사과정)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일본연구 일본연구 제3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85 - 11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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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를 논할 때에 무(武)를 제외하고 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나 문(文)의 역사가 중심이 되어 진행된 헤이안(平安) 시대의 말기부터 근세 에도(江戸) 막부가 설립되는 그 순간까지 몇 백 년에 걸친 역사는 무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무사 계급이 출현한 초기 시기의 일본 무사들에 대해서 연구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파악하였다. 그렇기에 본고에서는 군키 모노가타리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중심에 두고, 여러 작품을 살펴봄으로서 작품 내에서 관서(関西) 지방의 무사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그들 관서 지방의 무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명예에 대한 인식과 사생관에 대한 표상을 고찰해보았다. 군키 모노가타리에서 그려진 이들 초기 일본 무사들의 표상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조정을 중심에 두고 황실에 대한 봉공을 통해 무사로서의 ‘이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관서 지방의 무사들은 관동 무사들과 다르게 무사로서의 무공만을 칭송하기보다, 조정과 황실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인식했다. 반면 관동 무사들의 경우에는 조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보다는 스스로의 무력과 개인적 역량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때로는 이들 관동 무사들의 경우 조정의 위명보다는 스스로의 무명에 더욱 자부심을 가지는 것으로 작품 내에 표상화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성은 당시의 관서 무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지역에 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죽음 방식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깊게 영향을 받은 관서 무사들은 죽기 전에 수계를 받거나, 머리를 깎고 법명을 받는 행위를 통해 사후의 벌을 가볍게 하려고 했다. 거기에 더해서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염불을 외우고 구원을 받으려 하거나, 죽을 때에 스스로 물에 뛰어드는 행위를 통해 입수왕생을 이루려고 했다. 반면 관동 무사들의 경우에는 그들 고유의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즉, 적에게 사로잡혀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욱 무사다운 죽음이라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어떠한 표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관동 무사들이 공유했던 가치관만이 가타리테(語り手)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상기 언급한 관서 지방 무사들의 특징으로 표상화된 두 가지 성향의 발생 원인은 각 지역의 무사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의 차이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적 차이점으로 인해 파생된 두 지방의 무사들의 양상이, 당대의 인물인 가타리테에 의해 작품 내에서 표상화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각 지역의 무사들이 보이는 양상을 반영한 것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던 지역에 따른 무사들의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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