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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윤휘탁 (한경대학교 브라이트 칼리지 교수)
저널정보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과학연구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1권 제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5 - 66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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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영구가 근대적인 항구도시로 변모하게 된 계기는 영구를 점령한 러시아와일본의 식민통치였다. 러시아와 일본의 식민당국에서는 신시가지를 조성해 도로를 포장하고 하수 시설, 가로등, 공중화장실 등을 설치했다. 또한 그들은 전신전화 교환국, 병원, 학교, 은행, 검역소 등을 세웠으며, 위생・방역・의료 체계도 갖추었다. 더욱이 그들은치안・경찰・행정체계를 갖추고 중국인 자치회 조직을 市政의 보조기관으로 활용했다. 또한 사법체계를 갖추고 중국인・외국인 및 총기・탄약에 대한 검열・검속을 강화해갔다. 영구의 모습은 러시아가 점령했을 때는 러시아風을, 일본이 점령했을 때는 日本風을 띠었다. 1906년 12월 1일부로 영구의 통치권은 청 왕조에 반환되었고 일본의 군정은 폐지되었다. 그런데 영구의 신시가지는 일본의 조차지인 관동주의 관할로 남겨졌다. 이것은 근대 초기 항구도시인 영구의 ‘식민지적 특성’을 보여준다. 개항 이후 영구의 인구는 늘기시작했는데, 중국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러시아인, 일본인, 서양인은 근대적인 도시설비가 갖추어진 신시가지(영구 동부지역)에, 중국인은 낙후된 구시가지(영구의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러시아인이나 일본인은 중국인과 교류 없이 폐쇄적으로 살았다. 러시아와 일본의 점령시기 영구는 각 민족의 위상에 따라 거주구역을 달리하는 독특한 도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점령시기 영구에는 공원, 스포츠・오락 시설, 극장, 여관, 요리점, 간이식당, 공중목욕탕, 사교클럽, 종교 시설, 운동장, 공회당, 경마장 등이 들어섰다. 오락・ 스포츠 관련 대회는 사실상 일본인만을 위한 것이었고, 참가자도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점령당국의 식민통치체계 운용과정에서 시정 보조인력으로 참여한 토착의 중국인은 점령 민족의 하위적 존재로 기능했고 그들의 처우도 매우 열악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개항과 점령을 계기로 근대도시의 모습을 띠게 된 영구에서의 삶에는 민족적 위상에 따른 식민지적 차별이 상존하고 있었다. 결국 제국주의 열강의 개항과 점령, 식민통치를 계기로 근대 문명시설을 갖춘 만주의영구는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해갔지만, 영구 시민 모두가 근대 문명의 이기를 골고루 누리지는 못했다. 즉 영구 시민들은 민족적 위상에 따라 거주구역을 달리했으며, 민족적 위상이 낮았던 토착의 중국인은 점령당국의 식민통치과정에서 민족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단언컨대 영구는 ‘개항(개척)’과 제국주의 강대국의 점령을 계기로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중첩된 表象으로서 독특한 항구도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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