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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배병욱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저널정보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과학연구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1권 제3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1 - 5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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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는 1881년 경 구마모토현(熊本縣)에서 태어나, 극우정당 국권당(國權黨)의 조선회에서 조선어를 배웠다. 1899년 구마모토현의 조선어학생으로 파견되어 3년 과정을 수료한 후, 일어학교 교사 등으로 근무하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성신보사에 입사하여 조선어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쟁수행을 도왔다. 이어서 동향 출신의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의 통역관보가 되면서 관계에 진출하였고, 한말 신문검열을 주도하였다. 강제병합 후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를 보좌하여 신문 통폐합에 앞장섰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발행을 주재하였다. 1922년 신문사에서 퇴사한 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의 인연을 계기로 경무국 촉탁이 된 그는 1923년부터 조선인과 일본인 유지들로 구성된 동민회를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어서 1925년 조선 불교를 친일화하기 위한 조선불교단을 조직하였고, 조선불교사를 설립하여 잡지 『조선불교』를 발행하였다. 동민회와 조선불교단은 실무자인 나카무라를 매개로 연속선 상에 있는 내선융화단체였다. 나카무라는 1945년 패전까지 조선에서 50년을 살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조선어에도 능숙했다. 그가 취직하거나 이직할 때마다 고향 선배 등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고, 이런 점들은 내선융화운동을 주도하는 데 큰 장점이 되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해 친숙했던 그였지만, 조선인의 민족성을 멸시하고 일본으로의 동화의 필연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또 1920년대에 조선인들 사이에 사회주의와 민족운동이 점차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 원인을 청년들의 사상의 위기라고 지적하고, 일본 불교에 동화되는 것이 해결책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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