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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영교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7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65 - 19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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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7월 18일 羅唐연합군이 泗沘城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9월 3일 蘇定方이 10만 군대와 함께 철수하자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다. 661년에 들어서 唐軍 1천이 전멸했고, 古泗에서 신라군이 패배했다. 그곳은 倭의 병력과 군수물자가 하역되는 항구와 요새들이 위치했다. 『資治通鑑』(661년 3월 조)과 「답설인귀서」(661년 2월)를 비교하면 古泗‘지역’(平倭縣;古阜)에 周留城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와 웅진도독부 사이의 병참선은 단절과 개통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662년 7월 劉仁軌와 金欽純이 마지막으로 보급로를 개통시켰다. 이때 김흠순은 19명의 장군을 거느린 신라군의 수장이었다. 『資治通鑑』(661년 3월 조)에서 金欽(純)을 신라 대표 장군으로 기록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김흠순은 전투를 통해 신라의 陸路보급의 위험성과 倭의 水路보급의 효율성을 인식했다. 시간이 가면서 古泗에 하역되는 倭의 병력과 물자가 늘어났고, 663년 3월에 2만 7천의 倭軍이 九州를 출발하여 白村江으로 향할 터였다. 같은 해 2월에 김흠순과 天存은 소백산맥 너머에 병력과 軍資를 투입해야 했고, 전라도로 향하는 첫 관문인 居列城(거창)을 함락시켰다. 그 싸움은 白村江戰의 서막이었다. 이어 두 장군은 함께 진군하여 함양분지→운봉고원을 거쳐서 居勿城(남원)을 함락시킨 뒤, 그곳에서 천존은 全州를 거쳐 북상하여 德安城(논산)을 점령했고, 김흠순은 남하하여 沙平城(순천)을 함락시켰다. 김흠순의 군대는 西進하며 倭船의 중간기항지들이 산재한 全南해안의 도서지역(百濟南畔四州)을 조직적으로 放火했다. 김흠순의 火攻으로 倭船의 진군이 지체되었다. 663년 3월 九州를 출발한 倭軍 2만 7천 가운데 8월 13일 白村江에 도착한 것은 1만 뿐이었다. 그날 신라기병의 방해로 倭軍은 상륙에 실패했고, 周留城과 연결하지 못했다.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8월 17일 신라군이 周留城을 포위했고, 9월 7일 함락되었다. 白村江에서 唐艦隊가 倭船 400척을 全燒한지 10일 후였다. 김흠순의 百濟南畔 4州 방화가 白村江戰의 승패를 좌우하는 단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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