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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주홍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73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37 - 26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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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애장왕대의 종묘개편에 반영된 지위 관념을 분석한 글이다. 애장왕대의 개편은 『예기정의』와 대력 14년(779)의 묘의를 참고하여 王肅의 설에 따라, 제후 5묘로서 二昭二穆의 친묘 4를 부묘하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불훼묘를 소목의 수에서 별립한 것이었다. 두 대왕은 여전히 종묘에 모셔진 것이므로, 두 대왕의 별립을 근거로 원성왕계의 확립을 말하기 어렵다. 혜공왕대의 개편으로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大功德으로 대대로 허물지 않는 宗이 되었다. 이는 천자가 功德에 따라 祖宗을 세운 것과 같다. 신문왕 12년(692)의 태종 묘호 논쟁은 조종의 호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태종호에 반영된 천자의식은 혜공왕대의 개편으로 문무왕까지 확대되었다. 조종은 시조와 같은 불훼묘였는데, 이는 시조와 같은 공통의 조상이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원성왕은 ‘조종의 만파식적’을 계승할 수 있었고, 애장왕은 두 대왕을 계속 종묘에 모실 수 있었다. 皇祖, 皇考의 皇은 황제, 皇家를 의미한다. 이는 漢 宣帝가 皇考廟를 설립한 것과 唐 중종이 신룡 원년(705)에 종묘를 복원하며 皇家의 태묘, 皇考, 皇兄이라 표현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애장왕대에 친묘 4를 부묘한 것은 증조 할아버지인 원성왕과 함께 할아버지인 혜충대왕을 계속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섭정인 김언승은 개편을 통해 원성왕이 구축한 황가가 황조 혜충대왕과 황고 소성대왕으로 이어지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결국 애장왕대의 개편은 원성왕계라는 왕족의 확립이자 인겸계라는 근친 왕족의 분지화를 꾀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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