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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재호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영남고고학회 영남고고학 영남고고학 제83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91 - 125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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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송국리문화는 BC.10세기경에 성립한 농경사회의 문화로서, 청동기를 사용하며 구획묘라고 하는 거대한 묘가 조영되기도 한다. 송국리문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토착계설과 외래계설로 나누어져 논쟁이 이어져 왔다. 필자는 1992년에 토착계설을 주장하였으나, 그간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양쪽의 주장을 절충하여 송국리문화의 기원을 재해석하고자 본고를 작성 하게 되었다. 송국리문화를 촉발시킨 것은 중국 周나라의 문명과 남방에서 발달한 水田농경문화의 전파였다. 첫째, 周의 요소는 製陶術인 타날기법, 도량형인 석제 저울추, 중국계 토기 底部 그리고 귀속지위를 시사하는 옹관묘 등으로서 모두 호 서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된다. 둘째, 수전도작문화의 요소는 水田ㆍ덮개가마ㆍ독립동지주건물ㆍ플라스크형의 저 장혈ㆍ절굿공이 등이다. 이상 신문화의 영향으로 송국리식토기와 창의적인 석제농공구와 석검 등이 제작되었다. 또 전기사회의 복합가족체 는 핵가족체로 분화하고, 소형화된 송국리유형의 각종 주거지가 조영되었다. 그리고 획기적인 생산력의 논농사로써 수장사회의 일면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신문화를 전파시킨 주체는 산동에서 건너온 古越族으로 추정되고, 이들은 송국리문화를 통해서 중국의 문명을 이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노동집약적이고 혁신적인 생산력을 가진 논농사는 기존의 밭농사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그 러나 송국리문화는 주변지역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전기문화와 송국리문화와의 혼합비율에 따라 여러 지역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잉여생산이 풍부하지 못하여 아직 청동기가 자체생산 되지 못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형묘가 조영되지만 부장품의 생산도 빈약하였다. 그러므로 송국리문화사회는 분절사회에서 벗어난 정도였으며 이제 군장사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단계 정도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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