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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필동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사회와역사 제12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7 - 75 (6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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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는 사회학강좌(社會學講座)가 설치되어 있었고, 총독부는 1928년에 사회학제2강좌를 설치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이는 총독부가 3.1운동으로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사회학의 학문적·교육적 역할이 긴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사태는 제2강좌 설치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학을 전공하는 학생을 양성하지 않는 이상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민심 수습과 통치 안정을 위해사회학적 연구는 필요하지만, 전문 사회학도를 양성하는 데는 일본 정부와 총독부가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사회학 과목들(사회학개론, 사회학연습, 사회학특수연구)은 오래동안 법문학부 다른 전공 학생들의 선택과목에 머물러 있었으며, 강좌 담임교수 아키바 타카시(秋葉隆)는 혼자서 이 과목들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학문적 관심이 같은 종교학 교수와 함께 조선과 동아시아 지역의무속(巫俗) 연구에 주력하고 있었다. 1942년 사회학교육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스즈키 에이타로(鈴木榮太郞) 조교수가 충원되고, 사회학전공 학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경제의 변화와 일제의 중국 침략에 따른 사회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증가를 반영한것이다. 그 결과 사회학전공 학생수가 크게 증가했고, 사회학 강의수도 늘어났다. 또한 학생들은 사회조사에 참여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고, 1943년 10월에는 경성제대에서 열린 일본사회학대회에 참가하는 특별한 경험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무렵 전황(戰況)이 악화되자 일본정부는 그동안 유예해온 ‘학도출신(學徒出陣)’을단행하게 되었고, 다수의 학생들이 1943년 12월부터 입영(入營)하게 되었다. 이과정에서 아키바 교수는 학생들의 입영을 적극 독려했다. 학생들의 입영으로 정상적인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1941년 이후 입학한 20명이 넘는학생들 중에서 졸업자는 겨우 3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 결과 경성제대의 사회학은 후진 양성이란 측면에서 성과를 낼 수 없었고, 해방 후 한국에서 활동할 전문 사회학자를 길러내지 못한 채 종막을 고했다. 일부학생이 해방 후 경성대학을 통해 학업을 이어갔지만, 이후 학계에서 활동한 지도적인물은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경성제대에 사회학강좌와 전공이 있었다는 제도적 유산은 해방 후 경성대학과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설치되는 데 결정적인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경성제대의 유산은, 그것이 내장한 유럽적 학문 전통과 함께, 해방 후 극복·청산 담론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적 학문체제로의 압도적인 경사(傾斜)를 초래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경성제대 유산의 문제는 단절 또는계승의 차원으로 단순화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학문적 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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