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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자량 (숙명여자대학교)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19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261 - 284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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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리비는 의결집단과 집행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왕이 분쟁해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있는 점, 분쟁해결방식 체계가 다소 복잡하다는 점, 실제 집행은 현지인에게 독자적으로 맡긴점 등 통해 냉수리비와의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중성리비는 냉수리비와 시간적 격차가있었을 것이라 판단되며 441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냉수리비 단계에서는 왕이 직접공론에 참여하여 분쟁에 관여하고 있다. 또한 분쟁해결방식은 왕이 직접 참여한 교집단에서공론을 하고 바로 그 결과를 전달하여 보다 행정적으로 간결해졌지만, 왕이 참여했다는 점에서그 판결의 권위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체제 내에서도 국정운영의 변화양상을 확인할수 있는데, 그 변화 시점은 5세기 중반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중성리비가 세워진 눌지마립간대는 고구려와의 관계가 소강상태 혹은 우호관계에 있었기때문에 흥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은 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5세기 전반에는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 지배보다는 그 지역 유력자를 통한 간접지배로 지방을 관리했는데, 이 간접지배 방식은 6부에 의해 행해졌다. 즉, 6부 체제 동안에는 부별로 정복지역을 나눠서관리했을 것이고, 중성리비에 나오는 牟旦伐喙는 간거벌 이하 4개의 촌을 관리하면서 그 지역의 노동력을 소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牟旦伐喙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宮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무단으로 탈취한 것을 단독으로 해결하지 않고, 중앙에 있는 부들 간의 공론으로 해결한것을 보면 당시 6부 체제는 공론의 원칙 아래 중앙과 지방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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