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士大夫에게 있어 詞는 지금의 교양 선택과 같은 장르였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科擧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나, 동료나 친우가 먼저 塡詞하고 和唱을 요청할 때 못 짓는다고 하긴 남사스럽고, 明의 使臣들을 마중 나가는 遠接使의 일원으로 뽑히기라도 한다면 徐居正처럼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고, 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塡詞하는 법을 익혔을 것이다. 魚叔權의 『稗官雜記』 卷2에 의하면 成宗 7년(1476) 戶部郞中 祁順은 朝鮮에 使臣으로 와 漢江邊에서 遠接使인 徐居正을 괴롭히려고 「滿江紅(漢水風光)」를 지은 후 화답을 요구하였고, 徐居正이 마지못해 次韻하여 塡詞하였더니, 祈順은 통역에게 “이 사가 음절이 맞지 않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민족문화추진회, 『國譯 大東野乘』, (서울: 民文庫, 1989, 重版), Ⅰ 752쪽 참고. 그 결과 高麗와 朝鮮에서 詞를 창작한 詞人들은 총 315명으로 160여개의 詞牌를 이용하여 총 2,072首를 남기게 되었다. 拙著, 『全高麗朝鮮詞』. (上海: 華東師範大學出版社, 2019), 1009쪽 참고. 宋나라하고 시기를 같이했던 高麗의 詞人들은 宋나라 사람들을 통해 詞를 배웠다고 하더라도, 明과 淸에 단 한 명도 유학생을 파견하지 못했던 朝鮮의 경우 詞人들은 인적 교류를 통했기 보다는 文集이나 詞籍의 수입을 통해 詞를 접하고 배웠다. 朝鮮 李?(1725-1779)는 자신이 『金筌集』 『蘭?集』 『花間集』 등을 살펴보았다고 하였으니, 李?, 『含光軒集』, (서울: 德水李氏文惠公派宗會, 2017), 70-71쪽 참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종류의 詞籍들이 朝鮮에 수입되었고, 조선의 문인들에게 읽혔던 것이다. 다양한 詞牌를 접하기 위해서는 別集을 참고하는 것보다도 詞選集이나 詞譜類가 훨씬 도움이 된다. 朝鮮詞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朱熹詞의 경우 사용된 詞牌가 10개이고, 拙稿, 「朝鮮의 朱熹詞 受容 樣相에 관한 硏究」, 『중국학연구』, 2011 제57집, 6쪽 참고. 陳與義의 『無住詞』는 사용된 詞牌가 겨우 12개인데, 拙稿, 「陳與義詞가 朝鮮의 詞와 詩에 미친 影響」, 『중국학연구』, 2014 제70집, 48쪽 참고. 朝鮮詞에 출현된 詞牌는 무려 160 여종에 이른다. 이 많은 수량의 詞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別集 이외에도 반드시 詞選集이나 詞譜類의 유입이 있었을 것이고, 朝鮮의 詞人들은 이런 詞籍들을 통해 수많은 詞牌를 접했을 것이다. 五山 車天輅(1556-1615)가 溫飛卿부터 薛昭蘊 張泌 毛文錫 和凝 孫光憲 魏承班 등의 十 餘人의 작품 百餘首를 뽑아 『花間集』이라 이름 짓고 石峯 韓濩가 직접 그 내용을 적었다고 하였으며, 李福休, 『漢南集』, ?近畿實學淵源諸賢集』,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 권7 150-151쪽 참고. 동 시대의 許均(1569-1618)도 溫庭筠과 南唐의 後主 李煜의 詞를 골라 뽑아 『溫李艶體』 1卷을 만들고 역시 石峯 韓濩에게 붓글씨를 청했으며, 許均, 『국역 惺所覆?藁』, (서울: 민문고, 1989), Ⅱ 附錄 84쪽 참고. 宣祖(1567-1608 재위) 또한 국비를 들여 活字本으로 『詩餘圖譜』를 간행한 것으로 보아, 金學主, 「朝鮮時代刊行 中國文學關係書槪況」, 『東亞文化』, 1987 第25輯, 10쪽 참고. 坊刻本은 경제적인 이유로 활자 인쇄를 사용하지 못했고, 대부분 목판으로 출판을 진행하였다. 朝鮮 中期 특히 宣祖 때에는 詞籍에 관한 관심도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花間集』의 뒤를 이어 朝鮮의 中後期 詞壇에 영향을 미친 詞籍은 『草堂詩餘』이다. 宋代에 編選된 『草堂詩餘』는 明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明 毛晉은 「草堂詩餘跋」에서 “宋나라 元나라 사이에 詞를 골라 모아 만든 것이 거의 백여 개이나, 그 중 오직 『草堂詩餘』 하나만이 수백 년을 질주하였다 (宋元間詞林選幾屈百指, 惟 『草堂』一編, 飛馳幾百年來。” 施蟄存 主編, 『詞籍序跋萃編』,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4), 670-671쪽. 라고 말하면서 明代의 『草堂詩餘』의 영향력을 평가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草堂詩餘』의 明刊本이 40여 종이 넘는 것도, 楊萬里, 『草堂詩餘』, (武漢: 崇文書局, 2017), 4-21쪽 참고. 명나라 사람들이 『草堂詩餘』를 塡詞를 배우는 교과서로 여겼기 때문이다. 江合友, 『明淸詞譜史』,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8), 13쪽 참고. 원래 『草堂詩餘』는 分類本이 대세였으나, 明 중기에 이르러서는 分調本이 더 각광을 받았으며, 評語를 단 評批本이 출현되기도 하였다. 淸 康熙帝는 『歷代詩餘』와 『詞譜』의 序를 적고 그 책들을 천하에 頒布시킬 정도로 塡詞를 적극 후원하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草堂詩餘』는 여전히 塡詞 교과서의 역할을 차지하였다. 明淸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朝鮮에도 塡詞를 돕기 위한 詞籍이 유입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朝鮮의 文人들은 淸에서 직접 『草堂詩餘』를 구매하거나 또는 필사하는 방법을 통해 이 책을 널리 유포시켰다. 이들이 남긴 筆寫本 『草堂詩餘』 중에는 이미 중국에서 원본이 실전된 것들도 있다. “中國은 南北曲이 성행한 후에 唐宋 이전의 古樂이 모두 흩어져 남아있지 않는데, 소위 禮가 없어지면 밖에서 구하라는 것이다(而中國則自南北曲盛行之後, 唐宋以上古樂, 悉蕩然無餘, 所謂禮失求諸野者也。)” 許筠, 앞의 책, Ⅲ 附錄 62쪽. 라는 許筠의 말처럼, 本稿는 이들 중 현재 중국에 原本이 남아 있지 않은 筆寫本 중의 한 종을 분석하고자 한다.
Caotangshiyu is a general anthology of poetry in the South Song Dynasty. It became very popular in Ming Dynasty and had great influence on the circle of Ci. Also this book was a trend until Qing dynasty. So envoys from Chosen brought back these books on their way back home. Now there are various kinds of Caotangshiyu in korean libraries and most of them are hand written copy of it. This shows that even among Chosen's scholars Caotangshiyu was popular.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conduct an in-depth study on the versions of Caotangshiyu in Korea, which is the lost version in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