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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자료 미술자료 제94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89 - 11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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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樂園圖〉는 중국 북송대 문인 司馬光(1019~1086)의 정원인 독락원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사마광의 독락원을 구성하는 처소를 한 화면에 압축적으로 도해했을 뿐만 아니라 공필의 소청록채색을 구사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제문이나 인장이 남아있지 않고 관련 작품이나 문헌기록도 많지 않아 오랫동안 그림의 주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 〈行樂圖〉로 불려졌다. 失勢한 사마광이 낙양에 내려와 조성한 독락원은 은거와 집필을 위한 정원으로 漢부터 唐에 이르기까지 존경하는 문사들과 관련된 7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讀書堂은 유학자 董仲舒(B.C. 179~B.C. 93)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장소이며, 弄水軒은 당나라 시인 杜牧(803~852)과 관계되며 釣魚庵은 嚴光(B.C. 39~41)의 은거와 관련된 장소이다. 그리고 種竹齋는 대나무를 사랑한 王徵之(?~388)를 떠올리는 처소이며, 采藥圃는 후한대 은일지사 韓康(생몰년 미상)을, 澆花亭은 당나라 시인 白居易(772~846)를, 見山臺는 陶潛(365~427)을 기리는 공간이다. 사마광은 각 처소에서 이들 7명의 은거자적 행적을 떠올리며, 학문과 휴식의 이상적 목표로 삼았다.
필자는 독락원의 각 공간을 지시하는 모티브를 조화롭게 재현한 〈독락원도〉의 제작 배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明末의 작품에 주목하게 되었다.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에 소장된 譚玄의 〈독락원도〉는 국립중앙박물관본과 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여 〈독락원도〉의 유래 및 제작 배경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담현의 〈독락원도〉를 연결고리로 하여 중국 〈독락원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仇英(1494~1552)의 〈독락원도〉를 먼저 살펴보고 이후에 제작된 〈독락원도〉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유사작례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조선에서 제작된 〈독락원도〉의 고유한 성격과 미술사적 위상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구영의 〈독락원도〉는 사마광의 『獨樂園記』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이후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그림이다. 횡권의 화면에서는 독락원의 일곱 처소가 농수헌, 독서당, 조어암, 종죽재, 채약포, 요화정, 견산대 순으로 그려졌고, 각 공간에서 사마광은 홀로 사색하며 일곱 번 등장한다. 〈독락원도〉를 비롯한 구영의 그림은 인기가 높아 16세기 후반부터 소주에서는 구영의 위작들이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고 후대 화가들은 구영의 화풍을 따라 고사인물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17세기를 전후해 구영이 그린 횡권의 회화적 요소를 재구성하여 축 화면에 담아낸 구영풍의 〈독락원도〉들이 나타나는데 프라하국립미술관본과 쾰른동아시아미술관본이 대표적인 예이다. 회화의 매체가 변하면서 일곱 장면에 등장했던 사마광은 대나무 돔 안에 한 번 그려지고 각 장소에서 사마광이 했던 행위는 다른 인물들이 대신하거나 생략되었다. 후대의 제작자들은 도상적 변형과 화풍의 절충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독락원도〉를 제작하였고 이는 蘇州의 직업화가인 담현과 조선의 화가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에 〈독락원도〉가 언제쯤 유입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비교적 초기 기록은 李滉(1502~1571)이 그의 문인 黃俊良(1571~1563)의 10폭 고사인물화를 감상하며 적은 제화시 「落社獨樂」이다. 또한 洪柱元(1606~1672)이 소장한 〈涑水先生獨樂園圖〉와 1682년 金錫胄(1634~1684)가 구입한 구영의 독락원 장자에 대한 기록 등을 통해 조선의 문인들이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독락원도를 감상하고 인식했음을 확인하였다. 더불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독락원도〉의 화풍을 분석하여 이 그림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제작되었음을 밝혔다. 담현의 〈독락원도〉가 제작되고 반세기가 지난 후, 조선에서는 중국본과 유사하면서도 구별된 〈독락원도〉가 제작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본을 담현본과 비교해보면 경물과 인물 등이 생략, 통합되었고 새로운 모티브인 바둑판이 등장했으며 백거이의 요화정을 뜻하는 모티브로 붉은 원추리가 연꽃을 대체하였다. 이처럼 주요 모티브의 변형을 주도한 인물은 『古文眞寶』를 통해 사마광의 「독락원기」와 소식의 「司馬溫公獨樂園」을 숙지했던 주문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락원도〉를 비롯하여 〈잠직도〉(1697), 〈고사인물도〉, 〈성적도〉(1700) 등의 공필채색화가 중국화를 원본으로 하여 모사된 작품임은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특히 肅宗(재위 1674~1720)대에는 왕과 관료들이 중국화의 모사를 활발하게 진행했는데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남아있는 조선 전·중기의 그림이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다양한 중국화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중국 고사인물화에 대한 애호도 모사 열풍을 부추겼다. 특히 숙종은 내조한 중국인 화가 孟英光(1590년대~1648 이후)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작품을 여러 번 감상했기 때문에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맹영광의 공필채색화 임모가 이어졌다. 더불어 구영의 작품 역시 愛玩과 임모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화단의 경향 속에 평양의 직업화가인 曹世傑(1636~1705년 이후)의 작화 방식과 주문자와의 관계는 〈독락원도〉의 제작맥락을 추정하는 데 몇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문에 소장된 중국화 모사를 통해 華體를 익힌 조세걸은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 金壽增(1624~1701), 김석주 등의 주문으로 조맹부의 〈文姬別子圖〉, 맹영광의 〈洛神紅線圖〉 등을 임모하였다. 또한 宋時烈(1607~1689), 김수증의 주문으로 〈聚星圖〉를 제작했는데, 이들은 그림을 활용해 자신들의 뜻을 가시화하고 정치적 뜻을 같이 하는 서인계 문사들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작례로 비추어 〈독락원도〉는 유학자 사마광에 대한 존경을 품은 최석주와 같은 관료나 사마광의 은거에 자신을 투영한 실세한 사대부가 주문한 병장그림으로 생각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仇英의 〈독락원도〉와 구영풍의 〈독락원도〉
Ⅲ. 〈독락원도〉의 수용과 17세기 조선의 고사인물화
Ⅳ. 숙종대 중국화 臨模와 〈독락원도〉의 제작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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