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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민아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서양미술사학회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55집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137 - 162 (26page)
DOI
10.16901/jawah.2021.08.5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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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벽화의 의미와 벽화에 표명된 두 개의 민족-종파적 정체성의 본질을 고찰하고 있다. 분쟁 시기의 북아일랜드 벽화는 노동자 계층과 무장단체들의 저항 문화였고, 공공미술이라기보다는 공간을 점유하고 통제하는 정치적 행위의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21년 아일랜드 분할이 결정되면서 영국에 통합된 현재의 북아일랜드는 17세기 초부터 영국 개신교도들이 이주하여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원주민들과 끊임없이 분쟁했던 지역이다. 북아일랜드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약 2,000여 점의 벽화가 제작되었는데, 벽화 대부분은 트러블(1968-1998)로 불리는 북아일랜드 분쟁 기간과 이후 평화 정착기에 제작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UVF, UDA 등)과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같은 무장단체들이 벽화 제작의 주체가 되면서, 북아일랜드 벽화는 그 당시 영국의 공식 언론보다 더 역동적으로 민족-종파적 갈등을 보여주는 하나의 매체가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17세기 영국 왕이었던 윌리엄 3세의 도상을 그리면서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명했던 개신교 로열리스트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총을 들고 검은 복면을 한 이미지를 벽화로 제작하며 ‘침략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반면, 트러블 초기에 벽화를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가톨릭 공화주의자들은 1981년 단식투쟁가들을 그린 벽화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벽화는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이 결속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아일랜드 신화와 역사적 주제 및 새로운 양식이 도입된 공화주의 벽화는 ‘아일랜드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쟁 시기의 벽화는 휴전이 선언된 이후 북아일랜드에 공공미술 맥락에서 벽화가 제작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Abstract
Ⅰ. 서론
Ⅱ. 북아일랜드 벽화 제작의 주체들과 벽화의 등장 배경
Ⅲ. 단식투쟁과 공화주의 벽화: 정치적 탄압에 대한 저항의 표명
Ⅳ. 앵글로-아이리시 협정과 로열리스트 벽화: 승리주의에서 패배주의로의 전환
Ⅴ.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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