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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수정 (문화재청)
저널정보
한국민화학회 한국민화 한국민화 제13호
발행연도
2020.12
수록면
6 - 36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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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수첩은 전란 이후 극적으로 살아남은 집안의 유묵을 대대로 전가, 보장하기 위해 자수를 선택하여 표의하거나, 모수한 후 첩으로 묶은 것이다. 이후 전가된 수첩은 당대 명망있는 학자들의 제발이 첨가됨으로서 더욱 가치있게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수첩은 수 백 년에 걸쳐 제발 등이 보첨되면서 그 내력을 갖추기 때문에 자료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7세기 사가를 중심으로 제작된 수첩은 조상을 숭상하는 의미로 집중, 장정되었는데, 제작의 全과정은 남성이 주도하고, 자수는 바느질에 능한 집안 여성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 수첩은 원래 집안 보물로 전가될 유묵을 장정, 전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서인 송시열에 의해서 신사임당의 문예에 정치적 정체성과 학문적 정통성의 의미가 새롭게 부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7~18세기를 거쳐 서인계인사들에 의해 신사임당이 이상화되어 가는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면서 또 다른 의미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서인계의 신사임당에 대립하여 남인계에서도 『전가진완』, 『전가보첩』 등 집안의 여성 문예를 활발히 발굴하면서, 며느리 안동 김씨, 안동 장씨와 며느리 무안 박씨, 김임벽당을 통해 정치적 공방을 이어가게 되었다. 애초 17세기에 조상 숭상의 의미로 제작된 수첩이 18세기로 전가되면서 정치적 회오리에 휩싸이게 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17~18세기에 걸쳐 여성의 문예는 관심을 받게 되었지만, 이름난 예술가로 평가받기보다는, 정치적, 문예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남성들의 견해에 따라 끊임없이 평가받고, 분석되었다. 따라서 여성 문예의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17세기 수첩을 감평할때 개인의 능력일 리 없다고 본 여성의 문예적 능력이, 18세기가 되면서 점차 조물주의 능력을 능가하는 능력으로 평가받게 된 것은 그나마 미약한 인식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17세기 수첩제작의 가행을 효행으로 받들던 사가 여공 교육은 18세기가 되면 풍습의 변화와 사회 편견에 의해서 수첩 제작이 가행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계급사회라는 현실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에서 수첩을 통한 조선시대 문장가들의 숨막히는 공방 승자는 결국 신사임당이었으며, 그 신드롬(syndrome)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 17세기 수첩제작양상
Ⅲ. 수첩의 문예사적 가치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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