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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손경희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16집
발행연도
2020.9
수록면
97 - 140 (44page)
DOI
10.52271/PKHS.2020.09.11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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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은 대구부 전체 면적의 90%를 차지한 지역으로 1914년 분리되었다. 대구부가 급속히 식민도시로 성장하면서 달성군의 행정 구역 변동이 일어났다. 달성군 수성면에 설립된 수성수리조합은 일제로부터 대구부의 식민도시 기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요구받았다. 수성수리조합의 설립 목적은 관개배수였지만 대구부의 상수도 용수 보급 확대 역할이 컸다.
수성면은 일제초기부터 동척이민이 시행되고, 1920년대 초반 4만석의 쌀을 생산할 정도로 비옥하던 곳이었다. 이로 인해 민족 갈등이 심화되자 동척에서는「수성면지방개량조합」을 설립하여 식민지 융합정책에 활용하였다. 식민도시인 대구부는 일제 초기부터 상수도 시설을 설치하지만 급격한 인구증가로 물 부족 문제를 겪었다. 대구부에서는 여러 차례 상수도 시설 확장 공사를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수성수리조합을 설립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수성수리조합은 경북에서 세 번째로 1924년 5월 26일 설립, 1943년 대구 수리조합에 합병되었다.
수성수리조합 설립 주체는 대구부와 수성면에 살던 정재학, 진희규, 서상춘, 강석회 등의 조선인 대지주와 동척이민자였던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였다. 조선인 대지주들은 소작을 통한 농업경영을 하면서 사업의 다각화를 추진하던 인물들로 일제의 식민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미즈사키는 수성수리조합 몽리구역 내 토지가 거의 없었지만 이주일본인을 대표하여 부조합장이 되었다. 한편 수성수리조합은 설립 당시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인대지주들이 설립 주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성수리조합은 설립이후 1927~1939년까지 모두 흑자로 재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수성수리조합 설립으로 인해 지역사회의 변동이 크게 일어났다. 첫째, 대구부의 식민도시 기능 강화였다. 수성수리조합 저수지였던 수성 못이 농업용수가 아닌 일제의 식민정책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놀이공간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둘째, 수성수리조합 설립 주체였던 조선인 대지주들이 일제 권력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사업의 다각화를 추진하였다. 셋째, 수성면은 조선인대지주의 존재가 뚜렷한 곳으로 지주소작제가 강화되면서 소작쟁의가 심해졌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달성군의 농업 환경과 일본인 이주
Ⅲ. 수성수리조합의 설립과 지역사회 변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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