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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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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40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73 - 95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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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鄭齊斗가 조선 후기 대내외적 현실을 바라본 시각에 대해서 연구한 것이다. 정제두는 당대 주류를 형성한 서인-노론계와 다르게 현실을 인식했는데, 이는 그동안 양명학의 영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주장 근거가 주자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양명학의 영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명·청 교체와 내부적으로는 예송·환국·옥사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정제두는 조선이 청나라의 정삭을 받았기 때문에 청나라의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조선의 신하들은 배신이 되어 칭신하고 궤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원을 완전히 제압한 청나라의 힘을 자각한 상황에서 내린 현실적인 대청인식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정제두는 조선 내부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가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의빈과 경종의 상에서 제시한 예론 및 무신란에서 제시한 탕평론을 통해 그의 당대 조선 정치 현실 인식에 대해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는 ‘장자와 장자부의 상에 부모는 기년복을 입는다’라는 대전제 위에 예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을 거치며 時制로 정립된 『經國大典』을 근거로 한 복제설이었다. 정제두는 무신란 직후 조정에 올라와 朱熹의 경자봉사와 무신봉사를 통해 자신의 탕평론을 영조에게 제시하였다. 그는 병신처분 이후부터 당론이 심해져 무신란과 같은 화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 영조가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지니고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려서 죄진 사람은 벌주고 현자는 등용하는 준론 탕평을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론과 탕평론은 부분적으로 서인-소론계라는 자신의 인적 배경 경향성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당대 현실을 중시해 시제에 입각한 예론〔時〕을 주장하였으며 원칙에 입각해 지극히 공평한 탕평론〔中〕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조선 후기 대내외적 상황을 직시해 내린 공평무사한 현실 인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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