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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 중국학보 제91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61 - 184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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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維의 輞川莊에 대한 연구는 주로 문학, 예술 방면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한 연구는 드물다. 과거 장원이 당대 토지문제의 핵심 문제였던 점을 고려하면 다소 의외라 할 수 있다. 玄宗시기 장안 주변의 황실·관료·사인 등의 장원 취득은 일상적 현상으로 莊園은 이들의 주요 교유 장소이자 토지 소유의 확대 수단이었다. 당시 토지겸병 문제는 전국에 걸쳐 현안으로 대두되었고 당조는 각종 대책으로 이를 제어하고자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왕유의 輞川莊은 비록 토지겸병의 실례로 보기 어려워도 결코 관료·사인들의 교유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고 농업경영체 기능을 갖추었던 면모를 간과할 수 없다. 왕유는 장안에서 사환하면서 망천장에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관료·사인들과 교유하며 문화생활을 즐겼고 승려들과 교류하며 불교에 심취해 갔다. 사환과 은거가 비록 모순된 것이었지만 왕유는 이를 모순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당대 사인들이 은거를 사환하지 않은 상태로 인식했던 것과 궤를 함께하였다. 輞川莊은 바로 사환과 은거를 심리적으로 조절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왕유는 고위 관료들이 亡者 追福을 위한 사원 건립 추세를 배경으로 자신도 모친을 위해 망천장을 사원으로 만들었고, 이는 왕유 집안의 奉佛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결국 망천장은 토지겸병 추세 속에 취득하여 농업경영체이자 별장이었고, 왕유의 은거 생활을 거친 후 ‘家寺’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輞川莊은 당대 장원의 사원 개조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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