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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21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9 - 6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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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後漢 靈帝 시기 제작된 「熹平石經」과 曹魏 正始 연간에 건립된 「正始石經」, 그리고 西晉 咸寧 4년(278)에 간각된 「辟雍碑」의 사회적ㆍ시대적 역할과 의미를 고찰하고자 작성되었다. 「희평석경」의 경우 經學 극성기의 산물로 이해되었으나 당시 학술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오히려 경학의 쇠퇴가 진행되고 있었다. 太學은 교류의 장으로 전락하였고, 경학은 大義를 추구하기보다는 經句에 매달리며 형식화되었다. 또한 당시 經書에 定本이 없었던 것까지 더해져 문자 異同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문자의 異同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당시 지식인들이 황제권력에 대치하며 名聲을 얻고 있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문화적 기준의 확정이 오직 황제에게만 있음을 천명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정시석경」이 언제 제작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曹魏 明帝의 洛陽 宮城 수축과 긴밀한 관련을 가질 것임은 추측할 수 있다. 명제는 황제권력의 권위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수도 재건을 시도하였다. 자연히 그 과정에서 太學도 정비되었을 것이고, 태학 진흥의 일환으로 석경의 제작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제의 이른 죽음과 뒤를 이은 어린 황제의 즉위로 촉발된 왕조의 위기는 석경을 성격을 변화하게 하였다. 석경은 전성기 황제권력의 기념물이 아닌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어린 황제의 권위를 제고하기 위해 기능해야 했을 것이다. 석경이 완성되던 것에 맞춰 어린 황제의 講經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 모종의 신비성과 주술성을 가진 석경의 완성과 그에 맞춘 강경, 어린 황제가 古文에 능통한 儒敎世界의 지배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정시석경」과 마찬가지로 西晉의 「辟雍碑」 역시 왕조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서진 武帝는 당시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齊王 攸에 맞서 일찍부터 지적 능력을 의심받던 황태자를 보호할 조치들을 강구하였다. 그 일환으로 두 차례에 걸친 태자의 學禮 親臨과 그를 기념하기 위한 碑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그 비가 전형적으로 後漢 시기 민간에서 故吏들에 의해 건립된 頌德碑 혹은 顯彰碑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 주목된다. 「벽옹비」에는 학례를 담당했던 儒生들과 國子學의 학생들이 태자의 門生故吏를 자처하며 「벽옹비」의 건립 주체임을 드러냈다. 즉, 「벽옹비」는 태자가 유교 세계의 수호자이며 실질적인 지배자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가 앞으로 서진을 이끌어갈 국자학의 학생들의 유일한 스승이자 상관임을 선언한 기념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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