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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공간 일본공간 제25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05 - 14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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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8.15 직후 38도선 이북 일본인의 귀환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 함흥지역의 귀환단체, 특히 함흥일본인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함흥에서 처음 조직된 귀환단체인 ‘함흥일본인세화회’는 구성이나 조직 형태면에서 식민지 조선의 사회관계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성격으로는 38도선 이북의 달라진 정세에 대응할 수가 없었기에, 1945년 12월 3일 세화회는 ‘함흥일본인위원회’로 전면 개조되었다. 그리고 일제패망 이전에 조선인과 동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이소가야 스에지나 마쓰무라 기시오 같은 인물이 전면에 나서서 귀환단체를 주도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조선 및 소련 측 관계기관과 소통과 협력에 주력하였다. 이를 통해 귀환 전까지 재류일본인과 피난민의 생활난 해결을 위한 각종 구제활동, 집단피난민의 대량 소개(疏開) 과정에서 발생한 ‘부평 문제’ 등의 일정한 해결, ‘북선전재자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탈출’ 방식의 귀환 추진 등의 당면과제를 풀어나갔다. 그 결과 공식 인양 발표 전인 1946년 3~6월 사이에 함경남북도의 일본인과 피난민 다수가 귀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합법적인 탈출은 조선 및 소련 측 관계당국의 ‘암묵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이 시기 함흥일본인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집단탈출’은 사실상 ‘반(半)합법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한편 이들은 산업기반 건설과 재건 없이는 조선인 동지들이 새로운 조국을 안정적이고 총체적으로 건설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일본인 기술자 잔류’ 문제를 각종 지원을 받아내는 협상카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 양측에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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