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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34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5 - 3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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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안평대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대략 학위 논문이 90여 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100여 편, 단행본의 출판이 260건이나 된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그동안 잘 주목받지 못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였다. 세종(世宗)에게는 맏아들 문종(文宗)을 비롯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 여덟 아들을 두었지만, 왜 안평대군만이 문단의 중심이 되었을까? 그것은 대군이라는 지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에게는 당시 최고 수준의 시작 능력이 있었고, 이를 통하여 사대부들과 이상을 공유하며 공감과 지지를 받은 문예 지향적 리더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문예 지향적 리더쉽을 통한 이상향의 공유와 공감, 곧 소통인 것이다. 안평대군에 관하여 쓴 시문들을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33세가 되기 이전의 시문들에서는 그의 글씨를 호평한 시문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그가 비록 뛰어난 시적 능력으로 문단의 중심에 있었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33세가 되는 해 정월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의 검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는 이후로 안평대군의 서예에 관한 많은 시문이 지어졌다. 그는 36세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 전까지 짧은 기간 많은 찬사를 받았고, 그러한 평가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임을 여러 시문이 말해준다. 안평대군은 당시 사대부들과 이상을 공유하며 그 시대의 예술사상을 선도했다. 당시 사대부들이 안평대군의 작품을 보고 비평한 글들의 핵심은 시・서・화가 천도(天道)와 합일되는 경지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곧 시서화일률이다. 이 의미는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과 함께 시회 등의 모임을 통하여 시와 그림과 글씨가 모두 최고의 이상적 경계에 나아감을 추구한 것이었다. 이 논문의 핵심은 시・서・화를 통한 안평대군과 당대 사대부들과의 소통과 이상의 공유이다. 이것이 곧 안평대군의 문예 지향적인 리더쉽이었으며, 이러한 리더쉽을 통하여 그는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를 선도했다. 시・서・화가 어우러지며 조정의 중요 문신들이 참석한 이러한 문화는 조선 전체 역사 속에서도 이 시기가 가장 성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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