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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기석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5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37 - 88 (52page)
DOI
10.31218/TRKH.2019.09.1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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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말 의령남씨 가문의 몇몇 인사들은 16세기 큰 무공을 세운 南致勤(?~1570)을 기념한 『判尹南公先系』와 가문의 初刊譜 『宜寧南氏族譜』를 펴냈다. 남치근은 庶子女가 있었지만 嫡子를 두지 못해 유일한 嫡女壻인 양주조씨 趙摯의 후손에게 外孫奉祀를 맡겼다. 『판윤남공선계』에는 남치근의 외후손들을 모아 놓은 자손록이 첨부되어 있는데, 외손봉사를 계보적 형태로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그렇지만 외손들보다는 같은 남씨 집안의 傍孫들이 편찬을 주도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의령남씨족보』가 편찬된 것으로 보아 두 기록 모두 남씨 가문의 선대 기념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치근은 조선초부터 공신과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성장하였고, 그 형제와 조카들은 무과에 장원을 하여 무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남치근은 乙卯倭變과 임꺽정 난 토벌에 큰 공을 세워서 명성을 떨쳤으나, 軍中에서 너무 많은 살육을 일삼은 應報로 자손을 두지 못했다는 世評을 듣고 있었다. 남치근 본인도 자신이 無後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6명의 서자녀가 있었고 친조카들도 있었음에도 그는 妾子奉祀도 立後도 아닌 외손봉사를 선택했다. 외손봉사는 16세기까지도 성행한 구래의 관행이었지만, 남치근 본인은 7대조의 묘소를 돌볼 정도로 父系의식이 성장하고 있었고, 외손봉사를 불완전한 가계 계승으로 여기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 관행과 새롭게 확산되는 관념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사족층에게 있어서 성리학적 친족관념이 이념적 당위를 넘어서 내면적으로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가치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판윤남공선계』에는 남치근의 서자녀를 일체 기록하지 않았고, 입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원이 他姓인물이라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략 1세기 뒤의 외손들 중에는 繼子나 妾子를 입록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입후 관행과 적서 관념의 차이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파악하기 위해 『의령남씨족보』에 입록된 계후자와 서자녀 사례에 대한 표본 조사를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대략 16세기 전반부터 초기 입후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서자녀들도 16세기부터는 차등은 있지만 적자녀와 나란히 족보에 실릴 수 있는 자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외손봉사, 입후, 서자봉사의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서도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남치근의 사례는 서로 다른 관행과 관념이 공존한 과도기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목차

요약
머리말
I. 17세기 의령남씨의 계보정리 작업
II. 外孫奉祀와 立後의 추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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