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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2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51 - 73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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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 위치한 삼천사지는 고려 전기에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낸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탑비(塔碑)가 남아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삼천사의 연혁과 대지국사 법경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거의 없고, 대부분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어서 법경의 생몰년과 삼천사의 창건시기 등의 자세한 사실은 알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데 2005년 9월 12일부터 2007년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의해 진행되어 삼천사와 대지국사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삼천사지 발굴결과를 토대로 새로 밝혀진 사실을 소개하고, 대지국사비의 귀부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을 통해 그 특징을 찾아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 실시된 발굴을 통해 비교적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대지국사비 귀부 옆에서 탑비전의 유구가 발견되고, 명문을 가진 청동대발의 출토로 탑비전의 명칭이 대지암(大智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비편의 출토로 대지국사가 태현(太賢)을 계승하고, 삼천사가 법상종(法相宗) 사찰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법경에 관해서는 생몰년 추정이나 출가시기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자료가 명확하지 않아 어려움이 남아 있다. 대지국사비 귀부는 통일신라 석조 귀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입과 여의주, 상갑(上甲)과 다리 등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다른 귀부에서도 발견되어 11세기 귀부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하대이후 나타났던 용두형(龍頭形) 귀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귀 등의 부분적인 요소가 생략되고, 입에 물로 있던 여의주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또한 여의주가 사라짐에 따라 입의 형태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어 벌리고 있는 것에서 다문 형태로 변화한다. 둘째, 9세기와 10세기에 조금씩 나타나던 상갑의 반전이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고, 반전된 상갑의 범위도 앞다리에서 네 다리와 목 뒤, 꼬리 등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반전된 상갑에는 연잎과 비슷한 조각선이 새겨져 율동감 있는 표현임과 동시에 장식적인 효과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귀갑 안에 왕(王)자가 새겨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11세기 초의 거돈사지 원증국사승묘탑비에서는 비좌의 뒷면에 2개의 왕자가 양각된 반면, 이후 11세기 중반의 삼천사지 대지국사비와 11세기 후반의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등에서는 왕자가 귀갑 전체에 조각되어 그 조각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넷째, 귀부의 용신화(龍身化)가 두드러지게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 목과 다리에 용처럼 비늘이 조각되고, 특히 다리에 용의 신체적 특징 중 하나인 주모(肘毛)가 등장함으로써 머리뿐만 아니라 몸에도 용의 특징이 추가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 11세기에 조성된 귀부는 신라하대의 용두형 귀두로의 변화에 이어 신체에도 용의 특징을 갖게 되어 용신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삼천사지 대지국사비 귀부는 이러한 11세기 귀부의 변화 과정을 잘 알려 주는 예로 매우 중요한 조각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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